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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 생각

2025년 2월 11일 화요일 을사년 무인월 정해일 음력 1월 14일

by 단휘

나의 오늘을 시작하지 말아 버릴까 고민했다. 어제도 도저히 의욕이 생기지 않아 밖에 나가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싶었다. 낯선 곳으로 떠나가기보다는 그저 그렇게 소멸해 버리고 싶은 느낌이었다. 뚜렷한 원인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어쩌면 그 원인이 무의식의 영역에 자리 잡고 있어 내가 명확하게 마주하지 못하는 것뿐일지도 모르겠다. 어찌 되었건 나에겐 보이지 않았다.


생각이 많아지다가도 아무 생각도 나지 않기도 하고, 나 자신조차 나의 상태를 알 수가 없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즐거웠던 일이 더 이상 그 어떤 감흥도 없는 무언가가 되기도 하고, 그러다가 또다시 매몰되기도 하고. 인생을 예측할 수 없다고 하기 이전에 나 자신조차 예측할 수 없다.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여러 가지 감정이 뒤섞이다가 또 그 어떤 감정조차 없이 평온해지기도 한다. 무엇을 하고 싶은지, 원하는 게 무엇인지라도 알 수 있으면 좋겠지만 난 역시 나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게 없다.


늘 그래왔다. 나에 대한 정보를 직접적으로 인지하지 못하고 관찰을 통해 정보를 축적했다. 하지만 그렇게 얻은 정보는 일관성도 규칙성도 없고 시시각각 변해갔다. 좋아한다고 했던 것과 유사한 무언가는 싫어한다거나 긍정적이었던 것에 대해 어느 날 감자기 거부감을 드러내고, 마음에 안 들어하다가도 갈망하고, 온통 뒤섞여 있는 것만 같다. 향신료는 대체로 좋아하지만 고기에 향신료를 쓰는 건 크게 즐기지 않으며, 그렇다고 고기 본연의 맛을 즐기기보다는 야채 같은 걸로 그것을 중화하려 든다거나. (마늘이나 와사비는 잘 넣어 먹으니 향신료를 쓰는 것 자체를 거부하기보다는 종류를 가리는 것 같긴 하다.) 붕어빵이나 팥빙수 같은 팥이 포함된 음식은 대체로 손도 안 대지만 양갱은 좋아한다거나. 여러 모로 예측하기 어려운 녀석이다.


결국 쓸 만한 정보는 거의 없고 누군가가 나에 대해 물었을 때 대부분의 상황에서 나의 대답은 "모른다"가 될 수밖에 없었다. 때로는 "모른다"로 일관하기도 애매해서 "그렇다는 설정입니다"로 적당한 것을 내세우기도 한다. 내가 동물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면 많이들 놀랄 것이다. 서랍장 위의 공간이 판다로 도배되어 있지만 그중 90% 이상이 선물 받은 거다. 내가 산 판다 굿즈도 네 개 정도 있긴 할 텐데, 그것도 이벤트로 에버랜드 기프트카드 받은 김에 산 것이다. 물론 그 "그렇다는 설정입니다"와 별개로 폭신폭신하고 커다란 곰탱이 녀석은 기대든 안고 있든 드러눕든 꽤나 괜찮은 녀석이다.


오늘은 청년기지개센터에서 알고 지내는 청년으로부터 DM이 왔다. 사실 어젯밤에 온 거지만 오늘 오전의 끝자락에야 확인했다. 센터 프로그램과 관련해서 물어볼 게 있다고 하더라. 자주 연락하는 사이는 아니지만 이런 사소한 질문으로나마 나를 필요로 해주는 사람도 있구나, 싶기도 하고. 이렇게 짧게 스쳐 지나가는 관계의 연속이 좋다. 늘 연락을 하고 지내는 건 아니지만 언제 연락해도 어색하지 않은 정도의, 깊은 관계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마냥 가벼운 관계도 아닌 무언가. 적당한 거리감을 유지하며 상호작용하는, "친구"라고 부를 법한 누군가. 적당히 답장을 보낸 후 간단히 식사를 하고 나서, 느지막이 나의 오늘을 시작해 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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