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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 독서

2025년 2월 19일 수요일 을사년 무인월 기미일 음력 1월 22일

by 단휘

오랜만에 책을 펼쳤다. 책을 읽을 정신적 여유가 되지 않을 때는 책을 읽어봤자 남는 게 없기 때문에 책을 읽지 않고 지냈다. 언제부터인가 잘 안 읽혀서 가방에서 꺼내지 않고 지내다가 결국엔 가방에 가지고 나가지도 않게 된 지 오래다. 그래서 이게 얼마 만에 읽는 책인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내 방에는 책장이 네 개가 있고, 그중 일부는 책이 아닌 잡동사니를 쌓아두는 용도로 쓰고 있어 100권이 조금 넘는 책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 책들 중 이건 꼭 읽어야지 하며 인테리어로 두지 않겠다고 다짐한 책들이 모여 있는 칸이 있는데, 거기에서 유유 출판사의 책을 한 권 꺼내 들었다.


나는 집이나 카페, 그런 정적인 공간에서 책을 읽는 것보다 지하철에서 책을 읽는 것을 더 선호한다. 적절한 백색 소음과 주의 분산이 책을 읽는 데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어 준다. 조용한 곳에서 책을 읽다 보면 무언가 답답해서 책을 덮고 일어난다거나, 다리를 떠는 등 괜히 막 움직이는 경향이 있다. 센터 의자에 앉아 다리를 흔들며 정신 사납게 책을 읽는 녀석이 보인다면 그게 나일 수도 있다. 하여간 주의 분산은 피할 수 없는데, 그게 엄한 데로 가서 책 읽는 걸 방해하기보다는 지하철 주변 환경을 향해 분산되어 나는 책에 집중하고 나의 무의식은 주변 환경을 즐기는 기묘한 조화가 이루어진다. 책을 읽다가 잠시 멈추고 그 내용에서 비롯된 나의 생각에 빠질 때가 있는데, 의식의 흐름을 좇는 그 시간에 딴 길로 샐 잡동사니가 없고 단지 나와 내 책과 지하철 인파들만 존재한다는 점도 그곳에서 책을 읽는 걸 즐기는 데 도움이 된 것 같기도 하고.


겨울 외투는 대체로 주머니가 크다. 그래서 지하철 환승할 때 읽던 책을 주머니에 넣고 이동하기도 한다. 주머니에 딱 들어가는 크기의 책이 좋다. 내용도 흥미롭고 잘 읽히는 것도 좋지만 그 적당한 크기도 내가 유유 출판사에서 나온 책을 좋아하는 데 한몫했다. 유유에는 나를 위한 빈자리가 없을까 하는 망상을 하다가도 신입을 뽑더라도 경력자를 뽑겠지 하며 그 망상을 흩어 놓는다. 아마 나 말고도 유유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아 경쟁이 엄청날 것 같기도 하다.


평소에는 서점에 잘 가지 않는데 매년 서울국제도서전에서 상당한 충동구매를 하곤 한다. 만 이천 원짜리 식사는 주저하면서 만 칠천 원짜리 책은 충동구매 해버리는 나 자신을 발견할 때면 내가 그래도 책을 좋아하기는 하는구나 싶다. 1년 치 책을 도서전에서 한 번에 구입하여 쌓아 두고 읽는다고 봐도 무방한 느낌인데, 이번에는 워낙 책 읽을 정신이 아니었던 시기가 길어서 작년에 산 책을 다 읽지 못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도서전 부스를 전체적으로 한 바퀴 돌며 유유나 푸른숲처럼 어느새 익숙해져 내적 친밀감이 쌓인 출판사 부스를 마주치면 혼자 괜히 반가워하다가 독립출판 부스인 책마을에서 한참을 보내는 게 내가 서울국제도서전을 즐기는 방식이다. 우연히 마주친 낯선 출판사의 책과 반가운 출판사의 신간 도서, 그리고 흥미로운 독립출판물까지 다양한 책들이 나와 함께 집으로 향한다. 읽을 땐 주로 독립출판물에 먼저 손이 가는 편이다. 도서전 직후에는 독립출판물만 읽고 나머지는 이후 1년에 걸쳐 끌리는 대로 읽는 것 같기도 하고. 슬슬 다음 도서전이 오기 전에 작년에 산 책들을 털어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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