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2월 24일 월요일 을사년 무인월 갑자일 음력 1월 27일
서울에서 태어나 이사 한 번 간 적 없어 법적인 흔적만으로 보자면 나는 서울 토박이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누군가 나에게 고향을 묻는다면 나는 보통 충청남도 홍성 출신이라고 하곤 한다. 아무도 구체적인 시점을 기억하지는 못 하지만 대략 서너 살 때까지는 그곳에 살았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부모님은 늦은 시간까지 맞벌이를 하셨다. 초등학생 때의 기억으로는 하루 종일 집안에서 놀다 지쳐 잠들면 보통 그 이후에 그들이 퇴근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보다 더 어릴 때에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고, 그 어린 꼬맹이들을 돌볼 여력이 되지 않았기에 나와 나의 형제는 친척 집에 맡겨졌다. 한 곳에 둘 모두를 맡기면 부담이 될 거라고 생각했는지 먼저 태어난 나의 형제는 서대문구에 있는 친할머니 댁으로, 나중에 태어난 나는 홍성읍에 있는 외할머니 댁으로 보내졌다.
나의 형제의 경우 그래도 같은 서울에 있기에 주말마다 보러 가는 게 가능했다는데 나는 거의 한 달에 한 번 정도 보러 왔다고 하더라. 어찌 되었건 나는 그 시골 동네에서 어린 날을 보냈다. 그곳에서 살던 시절의 이야기는 이미 20년도 더 되어 기억에 남아있지 않고, 언젠가 전해 들은 단편적인 일화들만 남아있을 뿐이지만 말이다.
10대 시절 명절이나 김장 때 내려갔던 때의 기억만이 내가 스스로 기억할 수 있는 그곳의 흔적이다. 주변은 거의 돌아다니지 않고 집안에만 있어 동네에 무엇이 있는지는 잘 모르지만 말이다. 마당이 딸린 2층짜리 집에서 나오면 아래로 작은 밭이 보이고, 골목을 따라 나가면 허스키 두 마리를 키우는 집이 있고, 우회전해서 내리막길을 내려가면 마트가 있던 것 정도가 내 생활 반경이었다. 저녁 이후에는 많이 깜깜해서 완전 시골 느낌이었던 것과 당시 4G가 어쩌고 하는 게 나온 지 몇 년 된 시점이었지만 3G도 제대로 터지지 않을 때가 있는 데이터 환경이 기억난다.
그 어렴풋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옛날 집은 10대 후반, 더 이상 김장을 하지 않게 되면서 거의 가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몇 해 전 외할머니께서 돌아가신 이후로는 물건을 정리하러 갔던 게 전부였다. 이미 사람의 흔적으로부터 멀어진, 마당은 잡초로 뒤덮이고 옥상의 페인트는 벗겨지고 길고양이나 들어오는 폐가가 되어버린 공간. 나름의 애착을 갖고 있는 공간이었는데 말이다. 윗 세대의 재산 분할 과정에서 그 집은 이제 장남의 장남인 나의 사촌 소유로 넘어갔다고 전해 들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