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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 토템

2025년 3월 4일 화요일 을사년 무인월 임신일 음력 2월 5일

by 단휘

꼭 노트북을 챙겨 나오지 않은 날 이슈가 터진다. 정작 노트북을 챙겨 나왔을 때는 아무 일도 발생하지 않는데 말이다. 어쩌면 노트북은 이슈가 터지지 않게 만들어 주는 토템 같은 거 아닐까. ―라는 건 개발자들이 흔히 하는 이야기다. 가지고 다니면서 가방에서 꺼내지도 않더라도 그것이 가방에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혹시 모를 이슈에 대응할 수 있다는 편안함이 생기는 것 같기도 하고. 대학생 때 노트북을 두고 외출했는데 팀 프로젝트 서버에 이슈가 발생해서 핸드폰 터미널 시뮬레이터로 ssh를 통해 서버에 접속해서 이슈를 파악하고 해결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졸업 후 IT 업계를 등진 지금은 개발 및 운영하고 있는 서버가 없다 보니 그런 상황으로부터 자유로워졌지만.


요즘은 밖에서 작업할 게 있지 않다면 노트북을 가지고 나가지 않는다. 굳이 그것을 토템처럼 들고 다닐 이유는 없으니 말이다. 대신 사용 여부와 별개로 늘 가지고 다니는 토템 같은 물건들은 따로 있다. 그 녀석들은 늘 내 가방 공간을 차지하며 결코 작은 가방을 가지고 나가거나 가방 없이 나가지 못하게 만든다. 아무것도 없이 외출하면 엄청난 허전함을 느낀다. 설령 그것을 밖에서 꺼내지조차 않더라도 말이다. 이번에 기술교육원 다닐 가방을 꾸리며 살펴보니, 노트북을 보호한답시고 두껍고 튼튼하게 만들어진 가방이라 가방 자체 무게가 좀 있는 편이기도 하지만, 정말 굳이 안 가지고 다녀도 되는 녀석들도 종종 있더라. 그런 것들은 깔끔하게 배제하고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것만 넣었는데, 그것만 해도 양이 좀 된다.


사실 막말로 기술교육원 실습실에 있는 컴퓨터를 사용하기 때문에 아무것도 안 챙겨가도 문제없긴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가방을 가득 채운다. 내가 생각해도 불필요한 녀석들을 제외했음에도 기존에 가지고 다니던 것보다 조금 작고 가벼운 가방을 거의 다 채울 양이다. 지금 남은 것들은 대체로 실사용 여부와는 별개로 가지고 다니는 편이 좀 더 마음이 편한 것들이다. 친구를 만나러 갈 때 다이어리나 아이패드는 굳이 필요하지 않지만 그것들도 다 가지고 나간다. 그런 것들은 접근성 있는 상태로 두는 편이 마음 편하다. 생각해 보면 갤럭시 탭을 쓰던 시절부터 핸드폰은 방치해도 태블릿은 챙기는 경향이 있었다. 대학생 때 핸드폰을 깜빡하고 방에 두고 등교한 적은 있어도 태블릿은 그런 적이 없던 것 같다. 핸드폰은 보급형 기기를, 신제품도 아니고 가족이 쓰던 것을 받아서 쓰는 경우가 많았기에 태블릿이 유사시에 사용할 수 있는 범용성이 더 크다고 느껴졌던 걸까.


하여간 그 굳이 챙기지 않아도 될 다이어리와 아이패드와 이것저것이 든 가방으로 인해 활동성이 떨어지는 경우도 있긴 한데, 그런 걸 감안해도 늘 그것을 챙기게 된다. 습관적으로 챙기는 것일 수도 있고, 어쩌면 약간은 강박적인 부분일 수 있겠다. 그저 식사를 하고 가볍게 산책을 하다가 돌아오는 일정일지라도 가방을 챙겨 가는 녀석이니 말이다. 요즘은 그냥 토템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어찌 되었건 가지고 다니는 것만으로 그렇지 않은 것에 비해 내 마음을 편하게 해 준다면 충분히 토템이라고 할 만하지 않을까. 너무 무거운 것을 메고 다니면 어깨나 허리에 안 좋을 수도 있지만, 전보다 무게가 많이 줄었다며 이 정도 무게는 괜찮다고 주장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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