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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 여유

2025년 3월 14일 금요일 을사년 기묘월 임오일 음력 2월 15일

by 단휘

하고 싶은 건 많은데 그럴 만한 충분한 시간적, 정신적 여유가 없는 경우가 많다. 주로 정신적 여유가 없어서 못 하는 경우가 많긴 하지만, 때로는 재정적 여유마저 발목을 잡는다. 하고 싶은 게 없으면 없는 대로 많으면 많은 대로 삶을 살아가기가 쉽지 않다. 무언가 놓치고 사는 것 같다가도 그걸 다 붙잡고 살아갈 수는 없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아무것도 놓고 싶지 않다는 욕심이 생기기도 하고 말이다.


여유가 없을 때일수록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한다. 하지만 여유가 없을 때일수록 인지 능력도 떨어져서 선택도 집중도 평소보다 어려워진다. 평소에도 그걸 썩 잘하는 녀석이 아닌데 말이다. 무엇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건드려야 할지 헤매다가 아무것도 못하기도 한다. 분명 시간적 여유는 있었는데 어느 순간 보니 그것마저 사라져 있는 경우가 태반이다. 그렇게 결국 무엇을 할 것인지가에 대해서 고민만 하다가 시간이 사라지곤 한다.


그래서 나는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미리 적어놓고 있다. 체계적으로 계획을 세우는 걸 선호해서 다이어리에 하루 계획을 작성하는 게 아니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방황할 때 최소한의 방향성을 제시해 주기 위해 작성하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는 어떻게 살았는지를 옆에 기록하여 그 정도 상황에서 그 정도 일정을 처리할 수 있었는지 확인한다. 대체로 개인 일정은 계획과는 다르게 흘러가더라. 당일에 일정이 생기는 경우도 종종 있고 말이다. 기지개센터 청년 분이 저녁에 식사를 같이 하자고 부르면 다이어리에 적혀 있는 저녁 일정 초안을 갈아엎고 약속을 잡는다. 애초에 그것은 "이 시간에 이것을 해야 한다!" 라기보다는 "이 시간에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으면 이러한 선택지가 있는데..."에 가까운 형태라, 기술교육원이나 센터 프로그램 같은 뚜렷한 일정이 아니고서야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들이다.


느긋하게 여유를 즐기는 삶을 살고 싶지만 현실이 허락해주지 않는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이유도 촉박하게 준비하고 나가는 게 싫어서다. 조금이라도 더 잘 수 있다면 잠을 포기할 수 없다며 최대한 늦게 일어나는 이들도 있다고 하지만, 나는 잠보다는 그 여유를 포기할 수 없다. 9시까지 가야 하는데 이렇게 여유롭게 노트북을 두드리고 있을 시간적, 정신적 여유가 있다는 건 꽤나 괜찮은 일이다. 가끔 누군가를 만나 시간을 보내다 보면 시간이 너무 빠르게 흘러가 버려서 마지막에는 시간적 여유를 잃어버리기도 하는데, 그럴 때마다 난 그런 걸 썩 즐기지 않는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하지만 함께 한 시간은 즐거웠고 아무튼 좋았잖아? 그렇게 주장하며 나 자신을 달래곤 한다.


빠르게 흘러가고 많은 것이 변해가는 사회 속에서 나 혼자 유유자적한 삶을 살 수는 없겠지. 그래도 즐길 수 있는 여유는 즐기는 편이다. 집중해서 하면 한 시간 안에 끝낼 수 있는 일을 다이어리에는 두세 시간 정도 차지하는 칸에 채워 넣기도 하고 말이다. 실제로도 두어 시간 동안 느긋하게 작업한다. 문득 생각나는 게 있으면 검색해 보며 딴 길로 새기도 하고. 어느 여유롭지 못한 날에 그것을 빠르게 처리하며 삼사십 분 만에 끝냈을 때는 확실히 내가 느긋하게 행동하는 경향이 있구나 싶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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