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3월 13일 목요일 을사년 기묘월 신사일 음력 2월 14일
천성이 느긋한 인간이라서 그런가 사고의 흐름도 빠르지 않다. 특히 생각해 본 적 없는 부분에 대해서 생각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때로는 그 주제로부터 완전히 벗어났을 때 생각이 떠오르기도 한다. 완전히 뒷북이다. 실컷 대화를 나눌 땐 "잘 모르겠는데요"로 일관하다가 집에 가는 길이나 잠자리에 누울 때쯤에야 명확한 내 입장이 생기기도 한다. 심지어 며칠이 지난 후에야 문득 내 답이 스쳐 지나가기도 한다. 그 주제로 사고를 붙잡고 있지도 않았는데 무의식의 영역에서 갑자기 튀어나온다거나.
자주 그러다 보니 나와 대화를 나누는 사람 입장에서는 조금 답답할 수 있다. 저 녀석은 왜 맨날 '글쎄요'와 '잘 모르겠는데요'로 일관할까. 그래놓고 나중에 보면 본인 입장이 있긴 하던데. 그런 식으로 생각한다고 해도 할 말이 없다. 한참 전에 지나가버린 주제에 대한 내 답이 나왔을 때 그것을 언급하기엔 꽤나 뒷북이고 다소 뜬금없을 수 있기에 굳이 더 언급하지 않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 "생각해 봤는데, 이건 이러이러한 것 같아요" 하며 한참 뒤에 이야기할 만한 것까지는 아닌 경우도 많고 말이다.
최근에도 그랬다. 월요일 저녁에 만난 이들과의 대화에서는 "애매하네요, 그 녀석의 심리는 그 녀석만이 알겠죠? 혹은 그 녀석이라면 자신조차 모를지도 모르지만요." 하는 모호한 입장이었는데, 화요일 밤에야 내 입장이 정리가 되었다. '그 녀석'의 입장이 어떤지 내가 임의로 판단하기는 어려우니 중립적인 느낌으로 대화에 임했지만 생각해 보면 나는 '그 녀석'에 대한 이해도가 그렇게 낮지 않았다. 어떤 부분에서는 나와 유사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고, 그래서 내 방식대로 유추했을 때 '그 녀석'의 행동 패턴을 맞추는 경우가 꽤 있었다. 그렇다면 이거, '그 녀석'의 자리에 나를 대입해 놓고 판단했을 때 유의미한 가설이 나올 수도 있지 않을까. 그 주제의 이야기를 나눈 지 하루 정도 지난 시점에 내가 내린 결론은, "제 생각엔 당신이 착각한 게 맞는 것 같아요."
사실 이 주제는 조만간 한 명 추가해서 넷이서 만나 다시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기 때문에 정리된 내 입장을 밝힐 만한 계기가 있다. 대부분의 것들은 한 번 지나가고 나면 다시 언급하기 애매한 경우가 많은데 말이다. 그래도 가끔은 "있잖아, 생각해 봤는데..." 하면서 언젠가의 주제를 끌고 오기도 한다. 상대가 '뜬금없이 갑자기 그 얘길 한다고...?' 하고 당황하지 않을 만한 사람일 경우에는 말이다. 가끔은 그런 녀석이라고 판단해서 얘기했는데 저런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언젠가의 대화 상대에게 이야기하기 애매하다고 판단되면 적당히 글로 남기는 경우도 있다.
내가 전화 통화를 어려워하는 것도 이러한 사고의 지연과 어느 정도 닿아 있는 것 같다.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는 즉각적인 소통을 필요로 하니 말이다. 그래도 대면으로 이야기할 때에는 비언어적인 요소가 그 공백을 메워주기도 하고, 생각하는 게 보이니까 상대가 덜 답답하겠지만 전화 통화를 할 때에는 상대가 답답해할 게 분명하다. 게다가 청각을 제외한 감각은 대화에 참여하고 있지 않다 보니 주의가 분산되어서 깊게 생각하기도 쉽지 않다. 그러다 보니 누군가 나에게 전화로 어떤 질문을 할 경우 그 통화 내에서 제대로 된 답을 받지 못할 확률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