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 그림

2025년 5월 17일 토요일 을사년 신사월 병술일 음력 4월 20일

by 단휘

내가 언제부터 그림을 그렸던가 하고 생각해 보니 그 시작을 찾을 수 없다. 나의 가장 오래된 기억에 이미 나는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 어렴풋한 기억은 열 살 무렵의 이야기다. 연필로 밑그림을 그리고 펜으로 선을 딴 후 색연필로 칠한다. 빈말로라도 잘 그렸다고 하긴 어려운 그림이었지만 어찌 되었건 그것을 즐겼다. 디지털 드로잉을 처음 시작한 건 중학생 때였을 것이다. 터치펜조차 존재하지 않는 핸드폰으로 그린 그림. 종이에 밑그림을 그린 후 사진을 찍고 그 사진을 최하단 레이어로 깔고 선을 따서 채색을 하는 방식이었다. 고등학생 때는 태블릿을 사용하기 시작했지만 갤럭시탭이 S펜을 지원하지 않던 시절이라 핸드폰 그림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저 화면이 조금 넓어졌을 뿐이다.


대학생 때는 액정 타블렛이 생겨 클립 스튜디오를 결제해 봤는데 생각보다 잘 쓰지는 않았다. 애초에 그걸 사용할 만한 환경이 쉽게 조성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Windows PC를 잘 안 쓰게 되면서 자연스레 같이 멀어졌다. Linux 환경에서는 사용할 수 없는 소프트웨어니까 말이다. 형제가 쓰던 아이패드를 중고로 저렴하게 구입하면서 좀 더 유의미한 디지털 드로잉을 할 수 있게 되었다가 다시 갤럭시탭으로 넘어가면서 역시 갤럭시탭은 문서 작업에는 용이하지만 그림 그리기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걸 느꼈다. 무엇보다 이거다 싶은 소프트웨어가 없다. 몇 가지 소프트웨어를 전전하다가 그나마 정착한 게 크리타였는데, 모바일 UI가 따로 구현되어 있는 게 아니라 PC UI를 그대로 가져다 넣어 태블릿에서 사용하기 적합한 소프트웨어는 아니었다. 블루투스 키보드를 연결해 놓고 단축키를 눌러가면서 사용하는 게 그나마 괜찮은 사용법이다.


요즘은 다시 아이패드를 사용하고 있다. 아이패드 미니를 사용하는데 화면 크기는 고등학생 때 사용하던 갤럭시탭과 크게 차이 나지 않는 것 같다. 요즘 태블릿들이 워낙 크게 나와서 상대적으로 작아 보이긴 하지만 난 오히려 익숙한 크기인 것 같기도 하고. 휴대성 측면에서도 괜찮은 편이다. 그림 그릴 땐 큰 화면이 좋지 않겠냐는 주변 반응이 있긴 했는데, 작년에 팝업스토어 웨이팅 걸어놓고 들린 애플스토어에서 아이패드 미니를 써보고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느꼈다. 애초에 이보다 큰 화면에서 그림을 그려본 경험보다 그 반대의 경험이 더 많았으니 문제 될 게 없다는 입장이다.


구입 초기에는 아이패드도 있겠다 1일 1그림을 해보자 하는 생각도 했지만 그건 이미 오래전에 그만두었다. 뭐든 매일매일 해야 한다는 강박으로 하는 것보다는 기분 내킬 때 하는 편이 나은 것 같다. 학창 시절 공부마저도 하고 싶을 때만 하던 녀석이었으니 타고난 성향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고 싶을 때만 공부했는데 인서울 4년제 대학에 수시 입학 했다고 하면 뭔가 엄청나 보이는 착각이 든다.) 글도 그림도 하고 싶을 때만 한다. 아침에 일어나서 너무 피곤하다 싶으면 글은 패스하고 휴식을 취하기도 하고. 마감이 있고 책임이 있는 일을 하는 게 아니라면 그렇게 살아도 괜찮지 않을까. 자격증 시험이랑 비슷한 것 같다. 그럭저럭 괜찮은 삶을 살려는 거지 만점짜리 삶을 살려는 게 아니니까, 일상의 소소한 감점 요소들은 충분히 괜찮은 거 아닐까. 물론 그것들이 지나치게 많아지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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