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 쾌적한 방

2025년 5월 26일 을사년 신사월 을미일 음력 4월 29일

by 단휘

내 방에는 디지털 피아노가 있다. 삼익피아노의 GX-300H라는 모델이다. 초등학생 때부터 거실에 있다가 대학생 때 내 방으로 들어온 녀석인데, 상태가 썩 좋지는 않다. 건반은 문제없이 잘 눌려 피아노를 치는 데 지장은 없지만 부가적인 버튼들이 대부분 눌리지 않는다. 옆면 시트지도 일부 떨어져 나갔고, 여러 모로 낡은 티가 난다. 아파트 복도 쪽 벽에 붙어 있던 피아노를 지난겨울에 처분하겠다며 처분 준비를 하다가 아직 처분하지 못한 채 H형 책상의 책장과 나란히 두고 있었다. 언제라도 꺼내 치울 수 있게 벽면에서 끄집어내고 그 벽은 나에게 필요한 가구로 채운 뒤 (정확히는 방에 어설프게 있던 녀석들을 정리해 놓은 것이다) 나갈 수 있는 상태로 만든 것이다.


그렇게 하니 내 방에 들어가면 문 정도 너비의 공간이 있고 피아노를 빙 둘러 들어가면 실제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이 나왔다. 그 공간은 H형 책상의 너비 정도의 공간으로, 바닥에 요를 깔고 나면 남는 바닥 공간이 없었다. 방에 책장이 네 개나 있고 옷장에 행거에 이것저것 물건을 많이 두고 사는 편이라 가구들이 방에서 차지하는 면적이 넓지만, 그런 걸 감안해도 활용 가능한 공간이 거의 반토막 나 있는 상태였다. 그 상태로 몇 개월 지내다가 어제는 피아노를 한쪽으로 붙여 버리기로 했다.


원래 피아노가 있던 복도 쪽 벽과는 반대쪽으로 붙였다. 그 벽에는 책장 두 개가 나란히 있는데, 책장 하단의 두 칸은 문이 달려 있는 서랍 형태로 되어 있는 녀석들이다. 피아노를 그쪽으로 붙이면 서랍 공간을 사용할 수 없는 것을 빼면 큰 지장은 없다. 당분간은 방에 쌓아두고 살지만 잘 쓰지 않는 물건들을 넣어두는 창고로 쓰기로 하고 물건을 일부 재배치하였다. 그러고 나서 피아노를 책장에 붙이니 동쪽의 H형 책상과 남쪽의 피아노 사이에 대각선으로 30cm 정도의 공간이 나온다. 그 30cm가 내 방을 들락날락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인 것이다. 일단 난 그 정도 공간으로도 충분히 오갈 수 있으니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하여간 그동안 활용 가능한 공간으로 들어오기까지의 통로 역할 밖에 하지 못하던 공간을 이쪽으로 병합하여 기존의 1.5배 정도의 공간을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역시 난 바닥 공간이 넓은 게 쾌적하고 좋다. 책상을 중앙에 배치하고 벽면을 비워두는 구조도 해보고 이것저것 해봤지만 워낙 바닥 생활이 익숙한 녀석이라 가구들을 벽면에 붙이는 편이 나은 것 같다. 책상과 의자도 있고 선택할 수 있는 환경이라면 처음엔 의자에 앉아서 생활하다가도 결국엔 바닥으로 내려오는 경향이 있더라.


방을 쾌적하게 유지하면 한 가지 단점이 있다. 가족들이 자꾸 들어온다. 대학생 때도 넓은 바닥 공간을 유지하고 있던 적이 있었는데 방에서 과제를 하고 있으면 가족이 들어와 내 쿠션을 베고 누워 낮잠을 잔다거나 거기서 핸드폰을 하며 놀고 있더라. 방을 좀 더럽게 쓰면 덜 들어오는데 청소를 하면 자주 들어온다. 최근에는 피아노가 바리케이드 역할을 해주고 있었다. 문 열고 들어오자마자의 통로까지는 들어와도 실제적인 내 공간까지는 들어오지 않았다. 이제 그것은 바리케이드 역할을 해주지 못하지만 그래도 완전히 뚫려 있는 것보다는 출입구가 30cm 밖에 되지 않으면 덜 들어오지 않을까. 그런 기대를 하고 있다. 내 방을 온전히 쾌적한 내 방으로 사용할 수 있길 바라며. 그나저나 저 피아노를 어떻게 치우긴 해야 할 텐데. 중고로 팔 만한 상태는 아닌 것 같고 무료 나눔을 하든 폐기 처분을 하든 해야 하는데 또 언젠가의 미래로 미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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