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1월 13일 목요일 을사년 정해월 병술일 음력 9월 24일
판타지 세계관의 여관 주점 같은 공간을 좋아한다. 다양한 사람과 다양한 이야기가 모이는 곳. 어느새 익숙해진 사람과 약간의 기시감이 드는 사람, 그리고 초면인 사람과 모여 앉아 대화를 나누다 보니 새삼 내가 그런 걸 좋아한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되더라. 상대가 불편함을 야기하지 않는 한 낯선 사람이 섞여 있는 건 전혀 문제 되지 않는다.
새롭게 알게 된 사람을 얼마나 잘 기억하는지는 많이 갈린다. 갈리는 기준은 잘 모르겠다. 몇 번을 만나고 통성명해도 영 기억을 못 하는 경우도 가끔 있는데, 공통된 특징 같은 게 있나 탐색해보려 하였으나, 누가 거기에 속하는지 대체로 떠올릴 수 없어 포기했다. 그런 극단적인 사례가 아니더라도, 내 인지에 깊게 박히지 않은 이상 몇 주 정도 상호작용 안 하고 지내면 흐릿해진다.
생각해 보면 그렇다. 요즘 친하게 지내는 미정이도 나래도, 처음 만난 날과 처음 상대를 인지한 날 사이에 편차가 좀 있다. 대부분의 경우 몇 번의 만남이 있은 후에 어떤 유의미한 상호작용의 계기가 있었을 때 상대를 명확히 인식하기 시작한다. 예외적으로 초면에 상대를 인식하게 되는 경우도 있는데, 그건 정말 소규모일 때. 특히 아는 사람들 사이에 그 사람만 새롭게 알게 되었다는 식으로 새롭게 인지해야 할 사람이 극소수일 때.
어느 정도 안면을 트고 나면 이름도 모른 채 상호작용하는 경우도 많다. 그렇게 얼굴이 익었을 때 이름을 들으면 그래도 잘 안 까먹는다. 몇 개월 전부터 스몰토크를 나눴지만 몇 주 전에 이름을 처음 인지한 청년도 그랬다. 이름이 특이하거나, 긍정적이든 부정적인 나에게 강렬하게 인식된 이름과 비슷한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경우에도 잘 기억하는 편이다. (다만 그 경우, 그 비슷한 이름의 상대에 대한 감정에 따라 이 사람도 그럴 거라는 선입견이 생기기도 한다.)
센터의 주방 공간을 판타지 여관 주점처럼 사용하고 있다. 스낵바만 이용하고 자리를 옮기려다가도 재밌어 보이는 이야기에 끼어들곤 한다. 완전히 남일 때는 끼어들기 어렵고, 그 일행 중 아는 사람이 몇 명 있을 때 주로 그런다. 낯선 사람이 섞여 있지만 그 사람과 서로 이름도 뭣도 아는 게 없는 채로 그럭저럭 상호작용을 한다. 그럴 때면 이름이 뭐가 중요한가 싶다. 상대를 식별하는 기호가 필요하지 않은, 서로를 그저 있는 그대로의 상대로 바라보는 관계도 꽤나 괜찮단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