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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휘 Nov 07. 2024

#64 머리 쓰기

2024년 11월 7일 목요일 갑진년 을해월 을해일 음력 10월 7일

나는 머리 쓰는 것을 좋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싫어한다. 그것은 애증의 무언가다. 갈망하다가도 거부한다. 그 양가적인 감정 속에서 난 그것에 대한 입장을 명확하게 정리할 수 없다. 


머리 쓰는 것으로 승부를 보는 건 대체로 싫어하는 편이다. 추리 게임 같은 것에 대한 거부감이다. 범인이 누구일 것 같냐느니 진실이 무엇일 것 같냐느니 하는 것에 답을 하고 싶지 않다. 보드게임 중에서 루미큐브나 다빈치코드 같은 류의 게임에 대한 거부감도 있었는데, 아무래도 틀리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큰 것 같다. 그래도 '오늘만은 승부를 내려놓고 좀 더 가벼운 마음으로 무지성 프레이를 해보자' 했던 날에는 그럭저럭 즐기긴 했다. (보물상자가 두 개 남았는데 나에게 세 개 있다고 주장하던 그날이다.)


그러면서도 문제를 푸는 건 좋아한다. 시답잖은 퀴즈 같은 거 말고, 수학 문제 같은 거 말이다. 10여 년 전에 이미 그런 특성이 드러나, 당시 존재하던 대부분의 모바일 방탈출 게임을 섭렵했다. 그리고 과학탐구보다 사회탐구에 흥미를 느끼지만 수학 문제 푸는 걸 즐기며 수학 성적이 높다는 이유로 이과생이 되었다. 물론 나의 국어 성적을 본 많은 이들이 그 성적으로는 문과 가면 안 된다고 하기도 했지만 말이다. 나의 국어 성적은 때로는 영어보다 아래에 있었다. 주로 작가의 의도 같은 걸 묻는 문제를 많이 틀렸던 것 같다. 내 생각을 쓰라는 서술형 문제에 대해서는 뭐라도 쓰면 부분점수를 준다고 하는데도 백지로 내곤 했다. 하여간 문제 푸는 걸 좋아하다 보니 몸으로 문제를 푸는 신체 활동, 볼더링에도 금방 빠져들었던 것 같다.


일상에서 머리 쓰는 일에 대해서는 양가적인 감정이 특히 강하다. 정말 싫다, 라고 하면서도 은근히 즐기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일상에서 머리 쓰는 일이 뭐가 있냐고? 가끔 심리전을 걸어오는 녀석이 있다. 정확히는, 무의식적인 의도에 대해 행동하는 게 아니라 명확히 의식적인 의도가 있다고 느껴지는 경우다. 뭔가 낌새가 느껴질 때는 평소와는 다른 사고 알고리즘을 사용한다. 평소에는 많은 것들을 가볍게 넘기지만, 그 순간만큼은 가볍게 넘길 수 없다. 내가 가진 정보를 정리하여 답을 찾아내려고 한다. 그리고 내가 내린 결론은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편이다. 그저 나의 상대와 상황을 대하는 태도에만 조금 묻어날 뿐이다. 요즘은 그런 상황을 자주 야기하는 녀석이 한 명, 가끔 야기하는 녀석이 한 명 있다.


어떤 의도가 느껴질 때 그걸 파해치려고 하는 습성과 틀리는 것에 대한 거부감의 조합 때문일까, 나는 나보다 지능이 높은 자와 상호작용하는 것을 썩 즐기지 않는 것 같다. 게다가 그 사람이 상습적으로 어떤 의도를 드러낸다면, 내 신경은 자꾸 그쪽으로 가 있을 수밖에 없고, 가벼운 마음으로 있고 싶어도 무의식적으로 머리를 쓰게 된다. 어느 쪽으로든 지능 편차가 크면 상호작용하는 데 약간의 지장이 있지만, 지능이 낮은 자와 상호작용할 때 답답함에서 오는 스트레스보다 지능이 높은 자와 상호작용할 때의 정신적 피로도가 더 높아서 양자택일이라면 전자가 더 편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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