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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잘 지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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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잡다니 Mar 20. 2016

우주야, 안녕?

길냥이 우주와 만난 그 어느 날부터



어쩌면 널 만난 게 내겐 행운인지도 몰라.

그리고 어쩌면 우린 운명인지도 몰라. 

전엔 고양이를 싫어했는데

고양이를 좋아하게 된 지금에 널 만난 게 

다행이다 싶어. 

우리가 조금만 일찍 만났으면 

내가 널 그냥 지나칠 뻔했잖니. 

그래서 만남엔 타이밍이란게 필요한가봐.


고마워 우주야.

내게 나타나줘서.




2011.11.6   넌 어느 별에서 왔니?


고양이를 보았다. 

며칠 전에도 본 그 새끼고양이인지 

확신은 안가지만

내 시선을 빼앗은 것을 보아 

같은 고양이겠거니 짐작해본다.


자동차를 방패 삼아 잔뜩 웅크리고 경계하고 

나를 노려보는 그 새끼고양이가

너무 안쓰러워서 소시지를 사다줬다.


웃음이 났다.

그냥.


다음에 또 만나면 인사해 주어야지.

이름은 우주라고 지어줘야지.

우주를 닮았으니까.




2011.11.7   우주를 만나다


우주를 만났다. 아니 내가 찾아갔다. 

소시지를 들고.

소시지를 줬더니 바둥대다가 

내리막길에 굴려버린 우주.

그러곤 소시지가 자동차 바퀴에 끼어버려서 

앞발로 낑낑대는 우주에게 다가가서 

몇 조각 더 내밀었더니

꽤나 가까이 다가와서는 

날 빤히 보며 계속 냐옹대기만 했다.

 
왜 그런지 이유를 몰라 답답해 하다가

소시지를 잘게 잘라줬더니

우주가 고민 끝에 다가와 냠냠 식사했다.

 
아...

너무 컸구나.

좋은 거라고 클수록 많을수록 

다 좋은 게 아니었구나.


다음부턴 꼭 잘게 썰어줄게 우주야.

네가 체하지 않도록.




2011.11.8   외사랑 


점심쯤 집을 나서면서 

우주를 주려고 소시지를 썰어가지고

손바닥에 한 줌 쥐고 나왔는데

우주가 없길래 우주가 자주 앉아있던 곳에

소시지를 두고 학교에 갔다.


저녁에 학교에서 돌아와

우주가 소시지를 먹었는지 보려고

다시 그곳에 가봤는데 

소시지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어디에 있는걸까

오늘은 무얼 했을까

밥은 잘 먹고 다니는 걸까

날씨가 추워졌던데 감기 걸리진 않았나

온통 걱정된다.

 
우주는 아는지 모르는지

나만 미련하게

그렇게

온통 우주 생각 뿐이다.


 


2011.11.28   결국, 우주


기적같은 날이다. 우주를 다시 만났다.

어떤 천사의 도움으로 심지어 지금은 내방에 있다.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다더니

나의 공허함을 채워주려 

우주가 하늘에서 내려왔나보다.


난생 처음으로 고양이를 만져보고

고양이에게 먹을 것을 주고

고양이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고양이를 길러보게 된 신기한 날들이다.

 
우주야 반가워.

그동안 네가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넌 전혀 모르겠다는 도도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그래도 환영해. 

우리 이제 잘 살아보자 :-D




2011.12.3   마지막 이야기가 되지 않길 바라며


심하다 싶을 정도로 일주일 동안 

엄청난 양의 사진과 영상을 찍어댔더랬지.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면

꿈벅거리던 노오란 눈동자가 자꾸 생각이 나서 

기분이 설렜고

지독한 똥오줌을 나의 침대보에 지려놔도

밉지 않았었는데

 
손을 내밀면 내 손등에 와 얼굴을 부비부비하고

배를 툭 까고는 냐옹거리던 목소리도 

자꾸만 아른거리는데

 
우리의 인연이 이렇게 짧을 줄이야... 

우주야...

너무 속상해서 민망하게 눈물도 난다.


넌 그냥 도둑고양이가 아니라

그냥 길냥이가 아니라

그냥 키우던 고양이가 아니라

훨씬 더 큰 의미였나 봐. 나에게.

 

벌써 보고싶다. 으앙...




2011.12.5   from 상사병에 걸린 옛동거인


우주야,

날씨가 무지 춥더라 오늘.

나는 따뜻하게 장갑도 꺼내어 꼈는데

너는 시린 바닥을 어찌 그 고운 발로 걸어 다녔니.


밥은 잘 먹었니?

혼자 먹는 밥은 맛도 없던데.

고새 친구들 사귀어서 

맛있는 거라도 얻어 먹었다면

내가 한결 맘이 놓일텐데.

 
자꾸 너의 깜박이는 눈동자가 떠오르고

너를 처음 만났던 골목길과

네가 있던 내 침대 끝 

너의 자리가 계속 눈에 밟힌다.


사람들은 날 이상하게 볼테지만

나는 자꾸만 너만 본다.

네가 없는데도.

 
날씨가 춥다.

나는 감기에 걸릴까봐 

다락방 창문을 꼭꼭 잠그고

약도 먹고 따뜻한 커피도 마셨는데

넌 어디서 뭘하고 있니?


보고싶구나

오늘도.




2011.12.8   돌아온 우주


기대가 크면 실망할까봐

돌아오길 바라고는 있었지만 

사실 기대는 하지 않았었다.

우주와 떨어져있던 날을 세어보니 

겨우 5일이었다.

한참은 더 된 줄만 알았는데.


길냥이는 역시 길에 살아야 하나 봐

사실은 집이 갑갑했을지도 몰라

이름이 우주라 멀리 갔나봐

내가 요 며칠 쓰담쓰담이 좀 뜸해서 서운했나

개들이랑 혹시 싸웠나


우주가 떠난 후 

내 귓가와 머릿속을 떠다녔던 수많은

이유들을 오늘에서야 웃으면서 회상한다. 

 
우주가 돌아왔다.


기말고사 첫 날, 

시험 시작 10분 전에 그 사실을 알고

흥분해서 시험을 코로 봤는지 발로 봤는지는 

기억도 안 나고 냉큼 달려 집으로 왔다.

 
침대 밑에 꽁꽁 숨어 있는 우주를

냐옹거리며 불러내어 한참을 서로 부비대다가

밥도 주고 물도 주고 방석도 깔아주고 

변기에 모래도 깔아줬다.

너무 행복해서 미치겠당~♥

 
우주야.

다행히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이 

아직 더 남았었나봐.

다시 돌아와줘서 정말정말 고마워.

이제 헤어지지 말자.

우리도 앞으로 눈빛만 보면 통하는 그런, 

오랜 사이가 되자 :)




2011.12.25   메리크리스마스, 우주!


곁에 있는 이의 소중함은 잊혀지기 쉽다는 것..

요즘 우주를 보며 새삼 느낀다.

 
우주가 우리 집에 함께 살기 전엔

매일 같이 보고 싶고 걱정되고 생각나곤 했는데

가족이 되고 난 후엔 

간절함이나 애틋함이 확실히 줄었다.

 
이제는 제법 살이 올라서

돼지 고양이 포스를 살살 풍기며

거실 흔들의자에 앉아 뒹굴거리는 우주를 보면서

그저 몇 번 쓰다듬고 미소짓는 게 다인데,

 
그래도 좋은 것은 어느 새 우리 사이에 

믿음이란 것이 생겨버렸단 거다.

이젠 서로 눈치를 보지 않아도

무엇을 줄까 무엇을 받을까 계산하지 않아도

그냥 당연하게 좋은,

그런 사이가 되었다는 것이다.

 
비록 네가 없으면 내 삶이 어떨지를 

늘 상기하며 살진 않지만 

이렇게 가끔씩 특별한 날에는

내 곁의 소중하고 평범한 이들을 

특별하게 바라보게 된다. 

 
바쁘고 정신없단 핑계로

크리스마스 인사 한 번 

제대로 건네지 못한 하루였지만

늦은 크리스마스 인사를 전합니다.

메리크리스마스! 

언제 어디서나 부디 행복하소서 :-)





2016.3.20   우주야, 잘 지내니 


우주를 만났던 그 어느 날로부터 

벌써 4년이 훌쩍 지났어요.

그간 우주는 몇 번의 도망을 시도했고,

그렇게 집과 바깥을 왔다갔다 하며 지내다가

어느 날부턴가는

집으로 돌아오는 횟수가 줄어들었어요.

그리고 가끔씩만 마당에 찾아와 

밥을 먹거나 쉬다 가곤 했어요.


우주가 나타날 때마다 반가워 다가갔지만

우주는 점점 제게서 멀어졌고..

그 때마다 제게 다가와 부비적대던 

우주의 모습이 너무나 그리웠지만

변한 우주를 받아들이는 것이 

제가 할 수 있는 전부였어요.


그러더니 우주는 점점 지쳐보였고 아파보였어요.

도움을 주고 싶었지만 돌아보면 

우주는 금세 사라져 있었고,

언젠가부터는 더이상 우주가 나타나지 않았어요.


사람이 죽으면 먼저 가 있던 반려동물이

마중 나온다는 얘기가 있대요.

하지만 전 우주가 

아직 먼저 가 있지 않다고 믿고 있어요.

어디선가 잘 지내고 있겠죠.

부디 그래야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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