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두 살, 복수전공을 했던 심리학과에서 성격심리학 수업을 들으며 처음으로 MBTI 성격 검사라는 걸 해봤었다. 그때는 지금처럼 MBTI가 유행하던 시절도 아니었고, 내게는 그냥 열심히 달달 외워야 하는 시험 범위에 불과했다. 그래도 나의 성격을 몇 개의 문장으로 딱딱 짚어내는 것이 꽤 신기해 신뢰하는 검사 중에 하나였다.
그 당시 나왔던 나의 성격은 ENFJ였다. 정의로운 사회운동가. 20대 초반에는 그냥 내가 그런가 보다 했고, 그 성격이 변함없이 지속될 거라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졸업 후에도 가끔씩 잊을만하면 자가테스트로 MBTI 검사를 해보곤 했는데, 그때마다 늘 같은 유형이 나와서 역시 사람 성격은 잘 안 변하는구나 생각했다.
최근 MBTI가 어쩐지 대유행이 되고 난 뒤에 간단하고 귀여운 캐릭터와 함께 나오는 검사가 있어, 또다시 해보았는데 역시나 똑같이 ENFJ가 나왔다. 심지어 가끔씩 재미로 보는 여러 가지 콘셉트의 성격 검사를 해보아도 ENFJ가 나올 때가 다반사라 신기할 따름이었다.
대부분의 ENFJ 들은 본인의 성격에 부심이 있다고도 하고,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성격 유형이라 한다. 남에게 싫은 소리를 못하고, 평화주의자인 데다가 말을 예쁘게 하는 걸 아주 중요시하기 때문에 그럴 만도 하다. 이게 다 근본이 사람을 좋아해서 그렇다.
그런데 살면서 좋은 사람만 만나면 다행이지만, 인생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는 않기에, 어쩔 수 없이 마주치는 빌런들이삶의 곳곳에 존재한다. 그런 이들을 대할 때 엔프제의 자아는 자기 분열에 가깝게 고통스러워진다. (사실 웬만하면 사람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기 때문에 ENFJ가 미워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정말 누구에게나 찐 빌런일 가능성이 높다.)
엔프제들은 대개 남에게 상처가 되는 말을 할 수 없어서 스스로에게 상처를 주는 쪽을 택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래서 조용히 홀로 괴로움을 안아야 하기도 한다. 타인에게는 모나지 않은 사람일지 모르나, 가시를 제 몸 안으로 꽉 끌어안아서 보이지 않는 상처가 많아진다.
변하지 않는 성격을 어찌하겠는가 자포자기의 마음으로 살다가, 최근에는 여러 일들을 겪으며 독해지기로 마음을 먹는 일이 많아졌다. 나와는 전혀 다르게 사고하는 성격 유형을 찾아보며 그들의 생각을 닮아가려고도 노력했다. 물론 쉽지는 않았다.
그래도 우울에 빠지려 하다가도 한 번씩 다른 사람이라면 어떻게 생각할까? 하고 내가 원하는 특정 성격의 가상 인물을 떠올리며 상상하면, 마치 나의 심각한 일도 제 3자의 일처럼 느껴져서 조금 덜 함몰되는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