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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잡다니 Mar 14. 2016

집으로 가는 길

영화라는 이름의 미련



마지막 대전행 버스에 올랐다. 평소와 달리 오늘은 왠지 곧바로 눈을 붙일 수 없었다. 귀에 꽂은 이어폰에선 제이레빗의 '집으로 가는 길'이 고요하게 흘렀고, 버스는 고속도로 위를 천천히 달리기 시작했고, 따뜻한 온풍기 바람에 조금씩 졸려왔지만 왠지 잠들 수 없었다.


일 년 혹은 그보다는 적지만 꽤 오랜 기간 동안을 일주일에 한 번 이상씩 하루 종일 꼬박 함께했던 이들과 아쉬운 작별인사를 하고 오른 길이어서였을까. 찻잔 혹은 술잔을 기울이며 그들과 나눴던 대화들이 머릿속을 계속 맴돌고, 그들과 함께 시선이 닿았던 수많은 영화 속 장면들이 떠올라서였을까. 아님 버스에 오르기 전 펼쳤던 그녀의 작별 카드 속 꾹꾹 눌러쓴 글귀가 마음을 움켜줘서였을까. 아마 그 모두가 이유였겠지. 그래서 마지막 버스표도 쉬이 버릴 수 없었을 테고.


내가 영화를 좋아하게 된 건 언제부터였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어린 시절 부모님이 비디오 가게를 잠깐 하신 적이 있는데 워낙 어렸을 때라 본 영화라곤 거의 애니메이션뿐이었지만, 저녁마다 영화를 감상하는 엄마 아빠 사이에 누워 (중간중간 엄마에 의해 눈이 가려지기도 하며) 새로운 세계를 보는 것이 즐거웠다. 손 닿지 않은 높은 데까지 빽빽이 꽂혀있던 그때 그 비디오들이 지금 나의 발길을 여기까지 데려왔는지도 모르겠다.


중학교 3학년 땐 장래희망에 영화감독이라 적었던 기억이 난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 난 뭐가 되었든 평생 글을 쓰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했었다. 고등학교 땐 한창 다이어리 꾸미기에 열중했었는데, 영화 포스터를 조그맣게 인쇄해 다이어리에 오려 붙여서 짧은 영화 감상평을 적어두곤 했었다. 대학에 들어와 현대 희곡론을 들으며 처음으로 시나리오를 쓰고 영화를 찍어보게 됐다. 영화 속 철학이야기라는 교양과목도 골라 듣고, 이상심리학을 배우며 심리를 직접적으로 다룬 영화들도 접했고, 언론정보학과에서 영화론 수업도 맛보았다. 영화를 배우는 게 정말 즐겁고 재미있었다.


그러나 난 용기가 없었다. 아니 그보다는 간절함이 없었다. 지금 당장 학업을 중단하고 영화판으로 뛰어들어보라던 교수님의 제안에도 확신이 없었고, 시나리오를 부지런히 써보라던 어느 영화 PD님의 조언에도 망설이기만 했다. 그러다 보니 점점 나 스스로에게 미안해지더니 급기야는 슬럼프가 찾아왔다. 영화 보는 것이 더 이상 즐겁지 않아 졌던 거다. 좋은 영화를 보면 볼수록 화가 났다.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대책 없는 욕망이 현실, 아니 스스로 틀에 가둬놓은 미래의 벽에 자꾸만 부딪쳤고 난 한동안 영화를 끊었었다.


그러다 또 다른 하고 싶은 일을 만나게 되면서 영화에 대한 욕망을 잠시 잊어갔다. 그때의 나름 치열했던 고민들을 적었던 일기의 마지막 문장에 지금은 꿈을 잠시 보류하지만 포기하는 건 아니라며 언젠가 좋은 때가 있음을 믿는다고 끝맺었던데, 다시 보니 소름 돋는다. 어찌어찌하다 결국 나는 일 년 동안 서울을 살며 오가며 원 없이 영화를 공부했던 거다. 때론 버겁고 귀찮고 피곤한 날들이었지만 그래도 참 행복했다. 그 모든 핑계들이 내 행복감을 이기진 못했다. 고 이제야 생각이 든다.


물론 일 년 동안에 영화를 다 알았다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내게 큰 수확은 영화를 사랑하고 그것 때문에 치열하게 고민하며 사는 여러 사람들을,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동안 영화를 좋아한다 했던 것이 부끄러워질 만큼 다양하고 좋은 영화들을 많이 알게 된 것과 앞으로 평생 동안 봐야 할 영화 숙제를 얻었다는 것이다. 아직 영화에 대한 한이 완전히 풀리진 않았지만 적어도 못해본 것에 대한 후회는 없다.


언젠가 꼭 내 영화를 만들게 되겠지. 나의 무의식은 이토록 끈질긴 놈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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