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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잡다니 Apr 04. 2016

우연이라면

누군가의 마음을 알아준다는 것



가끔씩 누구에게도 말 못할만큼 슬픈 일이 생기거나 답답할 때면 난 우연이를 찾았다. 내 넋두리를 알아들을리 없는 우연이에게 다가가 속상한 마음을 조잘조잘 털어놓다보면 어느 새 마음이 조금 풀리곤 했는데, 내가 그럴 때마다 우연이는 다 안다는 듯 그윽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며 위로해주곤 했다. 그 고요하고 따뜻한 위로가 참 좋아서 언젠가부터 우연이는 나에게 반려견 그 이상의 존재가 되었다.



2009년 3월, 7년 전 봄날 우연이는 느닷없이 우리 가족이 되었다. 지금은 필연이라 생각하지만 그 당시 우연이를 처음 만났을 때 우리는 '우연'이라는 단어가 제일 먼저 떠올랐다. 작고 귀엽지만 단단한 몸체를 가지고 있었던 어린 우연이는 몇 달 사이에 쑥쑥 커버려서 곧 마당으로 내보내지게 되었다.



우연이가 처음으로 마당으로 가게 되던 날이 아직도 기억난다. 괜히 미안하고 안타까운 마음에 우리는 우연이를 밤에 다시 데리고 들어와 잤었다. 그러나 곧이어 새로운 강아지 식구들이 늘어나면서 우연이는 자연스레 마당에서 자리를 잡게 되었고, 그렇게 점점 혼자 지내는 것이 익숙해야 하는 마당개가 되어갔다. 우연이는 대문 밖으로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거나 마당에 돌아다니는 쥐를 잡으며 지내곤 했다. 그리고 가끔씩은 나와 함께 동네를 산책하거나 뒷산에 오르곤 했다.



대부분의 개들이 산책을 좋아하겠지만 우연이와 가끔씩 동네 이곳저곳을 걸으며 산책하는 일은 내게도 큰 즐거움이었다. 우연이를 데리고 밖에 나가면 큰 덩치로 인해 늘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곤 했는데, 신기해 하며 좋아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가끔씩은 우연이에게 위협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럴 때면 주인으로서 괜히 미안해지고 민망해지는데, 그 마음을 아는지 우연이는 밖에 나가면 짖지도 않고 대소변도 잘 보지 않았다.


그러나 최근엔 일이 많아지고 몸이 피곤하다는 핑계와 꽃샘추위가 길어진다는 핑계로 우연이와 산책을 오랫동안 가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며칠전부터 우연이는 밥도 잘 먹지 않고, 평소처럼 꼬리치며 신나게 마중을 나오지도 않 개집에 누워 나올 생각을 안 했다. 우리는 우연이가 너무나 걱정되었다. 병원을 데려가야하는 것이 아닌지 약을 먹여야 하는 것이 아닌지 밤마다 가족회의를 벌였다.  


그러나 내가 느낀 우연이의 눈빛은 단순히 통증이나 아픔으로 인한 것이 아니었다. 우연이가 혹시 외로운 것은 아닐까. 오랜 시간이 지나 혼자 지내는 것이 익숙해졌을 법도 하지 사람에게도 늘 기분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니듯이, 우연이에게도 울적하고 쓸쓸한 날들이 찾아온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날 이후 나는 우연이와 산책을 가야한다는 사명감에 불탔다.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퍼지기 일쑤였지만 때마침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봄이 찾아왔고,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기 시작했고, 때문에 오늘은 기필코 우연이와 산책을 하리라 다짐을 했다. 선선한 봄바람이 부는 오늘, 우연이와 프리미까지 데리고 벚꽃나무 아래로 산책을 갔다. 그동안 그렇게 기력이 없고 밥맛도 없던 우연이가 어찌나 힘이 넘치는지 헥헥거리면서도 계단을 오르락내리락 하며 나를 이리저리 끌고다니기 바빴다. 참 다행이었다.



누군가의 마음을 알아주는 일은 참으로 어려운 일. 그 어려운 일을 늘 묵묵히 해주던 우연이에게 나는 그동안 무얼 해주었나 반성하며, 이렇게 좋은 봄날이 다 가기 전에 우연이와 더 자주 함께 시간을 보내야겠다는 다짐을 했던, 아주 따뜻하고 시원한 봄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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