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잘 지내니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잡다니 May 06. 2016

스마트한 방정리

어느 구시대적인 사람으로부터



오랜만에 얻은 긴 연휴. 그동안은 휴일이 생기면 여기저기 싸돌아다니기 바빴지만 오늘은 비도 온다 하여 잠자코 집에 머물기로 했다. (결국 비는 오지 않았지만.) 모처럼 집에 있는 동안 그간 바쁘단 핑계로 계속 미뤄왔던 방청소를 하기 시작했다. 뿌옇게 쌓인 먼지를 털어내고 걸레를 빨아 구석구석 닦아내고 이제는 필요없어진 구시대적 유물들도 과감하게 버려버렸다.


이제는 들을 카세트도 없는 테이프들이나 여행 회화를 정리해놓은 자잘한 책자들, 새 앨범이 나오면 부리나케 음반가게로 달려가 구매했던 성시경의 앨범들, 다 쓰고 텍까지 떼어버렸는데도 굳이 버리지 않고 있던 오래된 통장들, 여행계획을 꼼꼼하게 적어둔 노트들, 이제는 아무도 찾지 않을 전자사전의 두꺼운 설명서나 혹시나 다시 쓸지 몰라 버리지 않았던 빈 선물상자 한더미.. 그리고 그 사이에 끼어있던 생일축하 쪽지를 몇개 발견하고는 문득 내 손으로 적었던 수많은 글자들은 누군가의 어딘가에 먼지 쌓인 채로 이렇게 파묻혀있을까 아니면 이미 세상에서 사라진지 오래일까 하고 생각했다.


예전에는 아주 중요하고 소중하다 생각하고 고이 모셔두었던 모든 것들이 이제는 먼지를 덮고 언제쯤 꺼내어져 버려질까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는 모든 것이 스마트해졌고, 세상은 복잡해진 듯 보이지만 우리의 삶은 참 단순해졌다. 여행을 갈 때도 더이상 지도를 출력하거나 루트를 손으로 일일이 적어갈 필요가 없어졌고, 영어공부도 종이 없이 충분히 할 수 있는 시대니까. 귀찮게 음악은 mp3로 듣고 사전은 전자사전으로 찾고 동영상은 PMP로 볼 필요도 없고, 생일축하도 선물상자 속 쪽지 대신 카카오톡 선물 보내기로 깔끔하게 끝내는 세상이니까.


그러나 난 어젯밤 아주 오랜만에 부모님께 드릴 어버이날 선물과 함께 손편지를 꾹꾹 눌러썼다. 손편지가 아무리 구시대적이고 이 편지가 혹 몇년 뒤에 먼지를 겨우 털고 일어나 빛을 보게 될지라도 나는 아직도 마음을 전달하기에 아날로그적인 것만큼 좋은 것은 없다고 믿는 구시대적 사람이라. 그래서 난 앞으로도 이렇게 방정리를 하며 진을 다 빼게 될지라도 계속 종이책을 사다 모을 것이고, 필름사진을 찍고 사진을 인화해 앨범에 넣어 보관할 것이고, 계속 붓과 펜을 들고 누군가에게 마음을 전하려고 한다.


세상은 계속 변하겠지만 개의치 않는다. 적당히 발맞춰 가며 걷되 내가 지켜내고픈 것들을 지키는 삶이 미련한 인생은 아니니까. 하며 스마트한 오늘의 방정리를 마친다.





매거진의 이전글 4월 이야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