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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잡다니 Jul 25. 2017

왜 느리게 살아?

조금 느려도 괜찮아.



나는 본래 느린 사람은 아니다. 아니, 느린 사람이 못 된다. 성격이 워낙 급해 문을 다 열기도 전에 몸을 나가려 해서 문짝에 부딪힌 적이 한 두번이 아니고, 내 전화를 받는 사람들은 내가 늘 통화 버튼을 누르자마자 여보세요를 외치기 때문에 휴대폰을 입에 갖다댄 후에는 "세요~" 밖에 듣지 못한다고들 말한다. 이뿐 아니라 나는 모든 일을 멀리서 크게 보곤 해서 작고 세밀한 것들은 쉬이 놓친다.


이런 내가 사진을 찍고도 현상과 스캔이라는 귀찮은 과정을 거쳐 참 뒤에나 확인할 수 있는 필름 사진을 찍고, 뚫어지게 관찰하고 한땀 한땀 그림을 그려야 하는 드로잉을 취미로 두게 된 것은 나름의 처방약과도 같다. 나는 좀 느려질 필요가 있는 사람이었던 거다. 반복과 기다림을 무지 싫어하는 내가 그래도 아직까지 이 취미를 놓지 않고 있는 이유는 이 처방이 나름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사진을 찍고, 드로잉을 할 때는 어쩔 수 없이 느려져야만 한다. 36방짜리 필름 하나에 약 4천원, 현상과 스캔을 하는 비용이 약 7천원이면, 사진 한 장에 대략 300원 이상의 값이 매겨진다. 막 찍고 확인한 뒤 쉽게 삭제할 수 있는 디지털 카메라와 달리, 필름 사진은 한장 한장을 찍을 때마다 귀찮은 시간과 적잖은 비용이 투자되기 때문에 신중해질 수밖에 없다.



드로잉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빨리 그리고 싶어도 어쨌든 사물의 형태와 그 안의 세밀한 요소를 관찰하지 않으면 그림을 완성시킬 수가 없다. 처음 드로잉 수업을 듣던 날, 마주 앉은 사람과 서로의 얼굴만 보고 자기 그림은 보지 않은 채 하나의 선으로만 그림을 그리는 시간이 있었다. 그림을 다 그리고 난 뒤, 난 내가 그린 그림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파트너가 내 얼굴을 사람답게 잘 그려준 반면, 나는 어찌나 눈동자가 산만한지 예쁜 얼굴을 괴물로 그려주고 말았다.


내게는 느리게 사는 일이 힘든 과제였다. 남들은 집순이처럼 3일 내내 집에서만 먹고 놀기도 한다는데, 나는 하루만 온종일 집에 있어도 몸이 근질거려서 밖으로 뛰쳐나가야만 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집에만 있다 하더라도 도통 가만히 쉬질 못했다. 미뤄둔 방정리라도 해야 했고, 하다 못해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며 의무적으로라도 생산적인 활동을 해야만 했다. 멍을 때려야 창의력이 발달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내겐 그 멍 때리는 일이 그렇게 어려웠다.



그래서 최근에 나는 스스로에게 또 하나의 처방을 내렸다. 바로 '단휴일'을 정한 것이다. '다니의 휴일'을 줄인 말인데 말 그대로 내게 주는 휴일이었다. 방학임에도 불구하고 하루를 온전히 제대로 쉰 적이 없는 내게 내려진 극약처방이었다. 단휴일에는 집 밖으로 나가면 안 되고, 누구와도 약속을 잡으면 안 된다. 또 무리해서 일을 처리하면 안 된다. 그리고 이 모든 일에 죄책감을 느껴서는 안 된다. 처음엔 쉽지 않았지만 몇 번을 하다보이제야 좀 쉴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기분이었다. 덕분에 여유의 맛을 조금씩 느끼게 되었다.


물론 이렇게 바쁘고 정신없이 사는 게 나뿐만은 아닐 거다. 당장 내 주위만 둘러봐도 온통 바쁜 사람들 뿐이다. 약속 날짜 하나 조정하기가 매번 힘이 드니까 말이다. 마치 바쁜 것이 미덕인 것처럼 당연하게 여겨지는 사회니까. 몇 년 전에도 마찬가지로 느리게 좀 살아보려고 읽었던 피에르 쌍소의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 라는 책에 이런 말이 나온다. '느림이라는 태도는 빠른 박자에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이 없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느림이란 시간을 급하게 다루지 않고, 시간의 재촉에 떠밀려가지 않겠다는 단호한 결심에서 나오는 것이며, 또한 삶의 길을 가는 동안 나 자신을 잊어버리지 않을 수 있는 능력과 세상을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을 키우겠다는 확고한 의지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좀 느리게 살아도 괜찮다. 아무도 그렇게 말해주지 않을 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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