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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잡다니 Oct 24. 2017

왜 글을 쓰나요?

나의 일기 역사



어느 누구도 내게 물은 적은 없지만 나는 가끔씩 혼자 질의응답을 하며 중얼거리거나 훗날 있을지도 모를 인터뷰를 대비하여 답변을 미리 짜두기도 한다. 내가 무언가를 쓰고 끼적거리는 기록 행위를 관두지만 않는다면 언젠가는 그런 날이 오지 않을까 하며 말이다.


아주 오래전부터 나는 일기를 써왔다.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쓴 일기장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글씨를 하도 못써서 선생님께 종종 혼나기도 했고 펜글씨 연습책을 사서 열심히 글씨 연습을 하기도 했다. 그 이후로도 나의 노력은 꽤 길게 이어졌다. 고등학생 땐 판서를 잘하시는 선생님이 수업을 마치고 나가시면 그 글씨 위를 손가락으로 따라 쓰며 칠판을 지우곤 했다.


글씨 연습을 하려다 보니 자연스레 계속 무언가를 적게 되었다. 그림 그리기나 낙서를 좋아했지만 어느새 붓보다는 펜을 드는 날이 많아졌다. 어떤 날엔 누군가의 멋진 글을 베껴 썼고, 또 어떤 날엔 내 하루를 기록했다. 그러다 내 생각이나 감정들도 적어내려 갔다. 가끔은 그 글을 시처럼 또는 노래 가사처럼 써보기도 했다. 글을 쓰면 복잡했던 생각이나 감정에서 한 발짝 떨어져 나를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이 좋았다. 


그렇게 글이 좋아 대학에 가서도 열심히 문학과 언어를 공부했다. 그리고 서툰 조각 글들을 모아 독립출판도 했다. 하지만 나는 부끄러웠다. 나는 남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책을 많이 읽지도 않았고, 깊은 생각을 할 줄도 몰랐고, 그저 끌리는 대로 글을 쓰는 (아니 싸는) 사람이었다. 이런 내가 어떻게 작가 소리를 듣고 창작자를 운운하나 싶을 정도로 부끄러웠다. 한 때 수필가가 꿈이라 말하고 다녔던 것조차도 참 염치없는 일이었다.


사실 올해 중반부터
나는 매일 쓰던 일기를 포기했다.

더 이상 기록을 위한 기록에 얽매이고 싶지 않아서였다. 내가 일기장에 (엄밀히 말하자면 스케줄러에) 쓰는 내용은 누굴 만나서 어디를 갔고 무얼 먹었는지 같은 시시콜콜한 얘기들 뿐이었다. 그 어떤 사유도 없는 의미 없는 기록들. 두 번 다시 들춰보지도 않을 그런 기록을 하느라 매일 시간을 쓰고, 혹이라도 일기가 밀리면 지난날의 기억을 깡패처럼 갈취하는 내 모습에 지쳤다.


과감히 다이어리를 접고 내가 시작한 것은 바로 메모 정리였다. 나는 주로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거나 바람이 부는 거리를 걷거나 처음 듣지만 멜로디가 좋은 음악을 만나면 어떤 이야기의 소재나 문장들이 떠오르곤 한다. 그러면 곧장 메모를 하는데 그동안은 그 메모를 일단 잡히는 곳에 적어두곤 했다. 그런데 다이어리를 접은 대신 바로 곳곳에 흩어진 그 메모들을 한 곳에 정리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작업은 꽤 길고 때론 귀찮았지만 분명 아주 의미 있는 작업이었다. 한 곳에 모으니 검색을 하기도 쉬웠고 전에 했던 메모를 찾으려고 이곳저곳을 뒤적일 필요도 없었다. 그리고 가끔씩 글을 쓰고 싶어 질 때 그 메모에서 글감을 꺼내와 글을 쓸 수도 있게 되었다. 일기란 하루하루를 기록하는 것이니 분명 매일 쓰는 데에도 의미가 있겠지만, 나는 그보다는 좀 더 특별한 날을 구분 짓기로 택한 것이다. 역사의 기록에 남는 일들이 그러하듯이.


어쨌든 나의 일기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일기의 신기한 점은 나의 아주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인데도 불구하고 누군가가 진한 공감을 해준다는 점이다. 나는 그 점이 늘 신기하고 재미있다. 그래서 내 일기를 끊임없이 공개하고 누군가와 나누었다. 나는 주목받기를 싫어하고 참 부끄럼이 많은 사람인데 한편으로는 누군가의 끄덕임을 늘 갈망하는 사람인가 보다. 물론 그 누군가가 때로는 나 자신이 되기도 한다. 스스로 내가 쓴 일기를 읽고 고개를 끄덕이며 "그래 그랬지." 하다 보면 혼자 고요히 치유가 된다. 특별히 아픈 곳이 없었을지라도.


내가 소설보다 수필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것이 진짜 이야기라는 데에서 오는 안도감 때문이다. 가상의 이야기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괜히 펑하고 터지면 사라지고 마는 불꽃이나 깨고 나면 희미해지는 꿈같은데, 수필은 그 작가의 진짜 이야기니까 내가 느끼는 감정에 뭔가 인증마크를 받은 듯한 기분이 든다.


인간은 하나의 소우주라는 얘길 어디선가 읽은 적 있다. 한 사람에게 담긴 이야기를 만나는 건 곧 하나의 우주를 만나는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것이 비록 사소하고 형편없고 지나치게 솔직하고 못난 이야기일지라도. 우리 모두는 조물주의 하나뿐인 소중한 작품이므로 우리의 이야기는 아주 특별하고 소중하다.


그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나만의 이야기를 모두가 쓸 수 있기를, 세상에 조금 더 넓고 빛나는 은하수가 펼쳐지기를- 바라며 오늘도 일기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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