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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잡다니 Oct 31. 2017

즐거운 나의 집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



내가 살던 집에 대한 첫 기억은 한 지붕에 세 가족이 모여 살던 수원의 작은 집이었다. 옆집에는 귀여운 동생이 살고 있었고, 또 다른 옆집에는 고운 할머니가 홀로 살고 계셨다. 그리고 안쪽엔 나를 아주 예뻐하셨던 주인아주머니가 살고 계셨다. 나의 유년기 동안 우리 가족은 수원의 작은 마을 입북리에 살았다. 그곳엔 함께 자전거를 타고 뛰놀 친구들이 있었고, 공장에서 일하던 외국인 이모들도 있었고, 아버지가 문에 달아주신 플라스틱 그네와 아버지의 낡은 오토바이도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나의 유년기는 충분히 풍성하고 행복했다.


대전으로 이사와 몇 번의 이사를 했지만 늘 같은 동네였다. 그래서 같이 놀던 친구들은 항상 내 곁에 있었다. 우리 집은 언제나 놀이터였고 친구네 집 역시 마찬가지였다. 엄마는 아무리 가까운 집이어도 친구네 집에서 자고 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는데 대신에 우리 집에서 놀다 자고 가는 친구들이 많았다. 가끔은 집 안에 있는 모든 물건들을 꺼내어 바닥에 깔고 놀기도 했는데 엄마는 그것을 한 번도 나무라지 않으셨다. 그래서 우리 집은 항상 신나고 즐거운 곳이었다.


외동딸인 내게 어느 때부턴가 항상 내 방이라는 것이 생겼는데 자라오면서 나는 내 방 문을 잠근 적이 없었다. 내 방은 항상 베란다를 끼고 있거나 창고 같은 것이 있어 부모님이 수시로 들락거리는 개방적인 공간이었다. 그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았고 오히려 당연했다. 심지어 사춘기 때도 마찬가지였다. 내 방이란 나 혼자서만 무엇을 하는 곳이 아니라 누군가와 내 삶을 나누고 공유하는 공간이라고 나는 자연스레 배웠다.


그리고 우리는 드디어 아버지의 꿈이었던 마당 있는 2층 집에 살게 되었다. 마당 있는 집은 다소 복잡한 생활 요구하는 집이었다. 나무를 심고 열매를 따고 낙엽을 쓸어야 했고, 강아지 똥을 치우고 비가 올 땐 마당에 고인 물을 빼내야 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아버지의 일이었다. 우리 집 마당은 곧 아버지의 작품과도 같았다. 계절에 따라 나뭇가지 사이로 가득 열리는 매실과 키위와 감을 따고, 매년 다르게 피어나는 장미와 담쟁이넝쿨의 키가 자라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은 정말 예술이었다. 지붕을 뚫고 자라난 매화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봄날엔 그 어떤 꽃놀이도 부럽지 않았다. 가끔은 사람들을 초대해 옥상에서 고기 파티를 열기도 했다. 


몇 년 전엔 집 담벼락에 사진 몇 점을 걸어두었다. 내가 사는 동네의 풍경과 이야기를 담은 사진들이었다. 가끔씩 사람들이 우리 집 담벼락 앞에 가만히 서서 사진을 보고 있는 모습을 보면 괜히 뿌듯해졌다. 어깨를 톡톡 두드려 이야기를 걸어보고도 싶었다. 작업실을 만들겠다는 명목으로 2층 다락방을 예쁘게 꾸민 것도 사실은 더 많은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해 편하게 이야기 나누고 싶어서였다. 물론 누구나 방해받지 않고 홀로 고요히 쉬거나 작업을 할 수 있는 공간을 꿈꾸지만 사실 나는 끊임없이 무언가 북적이는 집이 좋다.


아무리 좋은 집도 사람이 드나들지 않으면 금세 흉가가 된다고 하는데. 즐거운 나의 집이 있을 수 있었던 건 모두 사람의 온기 덕분인 것을 문득 깨달으며, 나홀로족이 늘어나는 세상 속에서 과연 나는 정말 혼자서 잘 살 수 있을까 꽤 고민스러운 요즘이다. 하긴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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