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많이 알게됐어 날
이십대의 마지막 한 달을 보내고 있다. 내년 그러니까 다음 달이 되면 (한국에선) 꼼짝없이 앞자리 수가 바뀌는데, 30대를 코앞에 두고 있는 것 치고는 생각보다 기분이 괜찮다. 스무살 땐 서른이 되면 훨씬 멋진 어른이 되거나 더 이상 철없이 살면 안 되는 것인줄만 알았다. 그러나 한 달만에 사람이 바뀌지만 않는다면 내 상상은 큰 오류를 빚은 셈이다. 나는 아직 멋진 어른도 아니고 여전히 철없고 모자란 사람이니까.
나를 찾아서 떠난 여행
대학 휴학생 시절 유채꽃 활짝 피는 봄에 제주도 올레길 여행을 홀로 떠났을 때 일이다. 그 때 난 스물세살이었다. 휴학을 결정한 건 말 그대로 학문을 쉬고 싶어서였다. 내가 누군지도 모른 채 이대로 살다가는 이도저도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기롭게 휴학서를 낸 뒤 나를 찾겠다는 그럴싸한 목적과 배낭 하나를 들고 처음으로 혼자 비행기를 탔다.
제주도에 도착한 첫 날 저녁, 공항 근처에 잡은 게스트하우스에서 홀로 여행온 서른두살의 K언니를 만났다. 우리는 함께 공항에서 봉고로 픽업을 받아 게스트하우스로 이동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배가 고파 숙소에서 함께 라면을 끓여먹다 서로의 일정을 공유했는데 마침 다음 날 우도로 가는 일정이 같아서 함께 하기로 했다.
지금은 많이 변했지만 그 당시 우도는 조용하고 사람이 드문 올레길이었다. 민박집 사장님께서도 밤이 되면 위험하니 해가 지기 전에 돌아오라고 신신당부를 하셨었다. 우리는 도미토리실을 예약했었는데 사장님께서 우리에게 조금 넓은 3인실 가족방으로 옮겨줄 수 있는지 물으셨다. 혼자 온 여자 여행객이 있는데 도미토리실이 부족해서 함께 3인실을 쓰면 어떻겠냐는 제안이었다. 우리는 흔쾌히 방을 옮겼다.
K언니와 함께 자전거로 우도를 한바퀴 돌고 저녁을 먹고 숙소로 돌아오니 새로운 여자 여행객이 방에 먼저 도착해있었다. 우리는 어색하게 인사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새로운 여자 여행객은 당시 26살의 P언니였다. 서로 알게된지 하루도 채 안 된 우리는 방바닥에 셋이 나란히 누워 잠을 청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배를 타고 나가려 했는데 날씨가 좋지 않았다. 배가 뜨게 되면 알려주신다는 사장님 말씀에 우리는 잠시 숙소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러다 배가 뜬다는 소식에 우리는 급히 항구로 향했다. 우도에서 무사히 나온 후에 언니 둘은 마침 일정이 같았지만 나는 다른 일정을 계획하고 있었다. 예쁜 유채꽃을 보며 걷고 싶었는데 당시 방사능에 오염된 비가 쉼 없이 내리는 상황이었다.
결국 나는 언니들의 꼬임에 넘어가 계획에도 없던 산방산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우리는 서로의 알몸을 공유하며 탄산 온천을 하고, 내리는 비를 구경하면서 쉼터 소파에 앉아 과자를 까먹으며 수다나 떨었다. 쏟아지는 방사능 비를 맞으며 걷고싶은 마음은 우리 중 누구에게도 없었다.
그 날의 시시콜콜한 대화를 여전히 잊지 못한다. 우리는 각자 여행을 왜 떠나왔는지 이야기 했다. 서른두살의 K언니는 다니던 직장을 그만 두고 쉬는 김에 여행을 왔다 했고, 스물여섯살의 P언니는 한라산을 등반하고 싶어 왔다고 했다. 스물세살이었던 나는 나를 찾고 싶어서 왔다고 말했다. 그런 나를 귀엽게 보며 웃던 두 언니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어떡하니. 그거 못 찾고 돌아갈걸?"
"맞아. 나는 평생 찾아가는 거야. 서른이 되면 뭔가 대단한 사람이 되는 건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고."
이제 조금 알 것 같아 날
살다보니 언니들의 말이 맞았다. 내일로 여행도 떠나보고 홀로 제주도에 다녀왔어도 나는 여전히 나를 다 찾지 못했다. 대신 아이유의 노래 가사처럼 이제 조금 나를 알 것 같았다. 이후 시간이 흐를 때마다 나는 조금씩 나를 더 알아갔다.
아이유의 팔레트라는 노래를 만난 스물아홉에 나는 고등학교 때 이후로 하지 않았던 때늦은 연예인 덕질을 시작하게 됐다. 스물다섯을 노래한 그녀의 목소리를 무한반복해서 듣다가 문득 지금의 나는 무얼 좋아하고 무얼 싫어하는지 그래서 나는 지금 어떤 사람이 되고 있는지 떠올려봤다. 그리고 아이유의 팔레트를 나의 이야기로 개사해서 창조적인 덕질을 해봤다.
이상하게도 요즘엔 그냥 집이 더 좋아
하긴 그래도 여전히 누굴 만나면 좋더라
핫초코보다 진한 밀크티를 더 좋아해
또 뭐더라 세계지도, 선인장, 펭귄, 새벽두시, 낙서장
I love it. I'm twenty nine 난 특별하단 거 알아
I got this. I'm truly fine 이제 많이 알게 됐어 날
긴 머리보다 턱 끝에 닿는 단발이 좋아
하긴 그래도 스무살 긴 생머린 청순하더라
오 왜 그럴까 조금 낡고 느린 걸 좋아해
조각보다 빛으로 그린 필름, 배낭, 길 잃었던 시간들
I love it. I'm twenty nine 난 평범하단 거 알아I got this. I'm truly fine 이제 많이 알게 됐어 날
스물아홉. 돌아보니 꽤 많이 나를 알게 됐다. 내가 아주 특별한 사람이라는 것도, 하지만 사실 아주 평범한 사람이라는 것도. 따뜻한 집이, 좋은 사람들이, 길 잃었던 수많은 시간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는 걸 알았다. 나다운 것이 꽤 많이 생겨난 것이 신기하면서도 내심 뿌듯했다. 그래도 헛살진 않았구나. 무언가 열심히 되고 있었구나.
스물한살에 10년 뒤의 나에게 썼던 편지가 있다. 서른한살이 되면 그 편지를 펼쳐보게 될텐데. 10년 전의 나는 어떤 기대를 가지고 살았고, 얼마 안 남은 2년 뒤의 나는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지 벌써 궁금하다. 아마 그 때도 완벽한 어른은 아니겠지만 나름 열심히 무언가 되고 있는 사람이겠지. 다만 그 때엔 내 모습이 누군가에게 조금이나마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이런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더욱 반짝이게 하는 모습이었으면 좋겠다.
어쨌든 일단은 (사실 인정하고하고 싶지 않지만) 내 남은 20대의 하루하루를 행복하게 즐겨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