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지도 빠르지도 않지만
오랜만에 새마을호를 탔다. ITX라는 새로운 이름을 달고 달리는 새마을호는 쾌적했지만 꽤 덜컹거렸다. 서울로 가는 1시간이라는 시간이 무얼 하기엔 너무 짧은데다 자리도 비좁고 답답했었는데 새마을호를 타니 꽤 여유롭게 이것저것을 할 수 있었다.
30분 정도는 영화를 봤다. 동네 파이 가게에서 사가지고 탄 아몬드파이를 먹으면서. 스마트폰으로 <로얄테넌바움> 이라는 영화를 틀었는데, 앞의 몇 분 정도를 전에 보다 말았던 기억이 났다. 영화를 보다가 챙겨온 책이 떠올라 4챕터의 내용이 시작되기 전에 잠시 영화를 끊었다. 책을 읽지 않으면 분명히 책을 가지고 나온 것을 후회하게 될테니까.
펼쳐든 책은 반 정도 읽다 만 박준 시인의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이라는 책이었다. 역시나 시인의 책은 아무리 에세이 같은 글이라도 쉬이 다음 장으로 넘겨지지가 않는다. 좋은 구절을 곱씹다가 메모도 해야하고, 모르는 단어의 뜻도 찾아봐야 했다. 그러다 정말 마음에 드는 문장을 만나면 덜컹거리는 기차 안에서 몇 번의 시도 끝에 사진을 찍어두기도 해야 하니까.
어둑해지는 창가를 바라보다 옥상달빛의 <Bird>라는 음악을 꺼내 듣기도 했다. 이렇게 혼자 고요히 바쁜데도 아직 수원이다. 빠르지 않다는 이유로 이렇게 참 하루가 풍요로워진다. 문득, 예전에 좋아하던 사람을 떠올리며 지었던 노랫가락이 떠올랐다.
무궁화호는 싸고 좋아 너무 느려 탈이지만
KTX는 빨라 좋아 너무 비싸 탈이지만 새마을호는 싸지도 빠르지도 않으면서
뭐가 그리 도도한지 가뭄에 콩 나듯 있네
너는 새마을호 싸지도 빠르지도 않아
너는 새마을호 도도해 죽겠네
나만 이렇게 느끼던 것은 아니었는지 대합실에서 옆에 앉았던 부부가 이 노래 가사 같은 대화를 나누는 것을 들었다.
"새마을호여? 1시간이면 가나?"
"아니여. 2시간 조금 안 걸려."
"뭐여 그게. 빠르지도 않구먼."
"그렇다고 싸지도 않어."
맞다. 싸지도 빠르지도 않은 새마을호를 탔지만, 사실 KTX보단 싸고 무궁화호보다는 그래도 조금 더 편하고 빠르게 간다는 사실에 위안을 삼는다. 아니 그보다는 덕분에 쾌적한 여유를 즐길 수 있게 된 하루에 감사했다.
어떻게 여기느냐에 따라 이토록 삶이 달라진다. 그동안 비난 아닌 비난했던 새마을호에 진심으로 사과하며 나는 아직도 서울로 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