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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겸 Jun 21. 2016

Day 14

그랜드 캐년


오늘 탄 거리: 10km (Tusayan ~ Grand Canyon Village)

총 이동 거리: 1038km


지금까지 여행한 날들 중 가장 행복하고 뿌듯한 날이다. 시작은 (어느때와 같이) 최악이었다.

캠핑장이 아닌 야생에서 자다보니 자는 내내 동물 소리가 계속 들렸다. 그 중 사슴 한 마리가 겁없이 텐트 옆애서 풀을 뜯어 먹는 바람에 칼과 후레시를 들고 탠트 밖으로 자다 나오기도 했다. 곰이나 마운틴 라이온이라도 될줄 알고 덜덜 떨면서 나왔는데 사슴이 날 보자마자 도망쳤다.

그리고 다시 잠들었는데 17달러짜리 아동용 텐트에겐 너무나 혹독한 날씨였는지 텐트 안에서 입에 돌아가는줄 알았다. 텐트가 사실상 방한은 전혀 안 되고 방충망 정도라고 보면 될듯 하다. 덕분에 새벽 네시에 이러다 죽겠다 싶어 텐트를 걷고 맥도날드에서 새우잠을 잤다.

(사진을 찍었어야 하는데 기분이 안 좋아 하나도 없다)

이미 기분은 완전히 잡친 상태. 사막에서 갇혔을 때만큼 내가 여기를 왜 왔나 싶더라. 아마 계속 캠핑을 해서 피로가 쌓여서 더더욱 그런듯 싶었다.

어쨋튼 그랜드 캐년까진 10km밖에 안 남았으니 잠을 좀 깬 후 다시 자전거에 올랐다. 잠도 얼마 못 자니 힘이 안 났다. 그렇게 십분을 갔나… 그랜드 캐년 입구와 함께 표지판이 보였다. 거짓말 안 보태고 눈물이 나더라. 무언가를 해냈다는 기분과 2주 동안 겪은 수많은 일들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내가 평생 살면서 어딘가를 가기 위해 이렇게 많은 에너지와 시간, 정신적 고통을 쏟은 적이 있던가. 너무 감격스러워서 피곤한 몸을 이끌고 사진도 한 장 찍었다.

공원을 들어간 후 바로 캠핑장으로 향했다. 인터넷에선 자리가 다 찼다고 했으나 혹시 몰라서 일단 갔다. 가보니 자전거 여행객 및 등산객을 위한 자리가 6달러에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이것도 모르고 어제 칼들고 사슴 좇으면서 잤다니… 또 한 번 기쁨에 젖어 캠핑장 직원에게 고맙다는 말을 수십번 반복하면서 신나게 텐트를 치고 샤워를 했다.

그리고 드디어 그랜드 캐년을 보러 갈 시간. 사실 어릴 적에도 와본 적이 한 번 있지만 그때는 장시간 운전에 피곤해서(운전은 아빠가 했지만) 제대로 못 본 것 같았다. 자전거를 타고 슬슬 절벽쪽으로 향하면서 내 눈앞에 아래와 같은 광경이 펼쳐지는데… 말을 잃었다. 어릴 때와 지금 보니, 특히 자전거를 타고 2주만에 와서 보니 완전히 느낌이 달랐다. 또 다시 한 번 감동에 빠져 계속 멍하니 쳐다보기만 했다.

그렇게 한 세 시간 동안 그냥 반대편을 바라보면서 감동에 빠진 체 다시 캠핑장으로 돌아왔다. 캠핑장에 도착하니 아침에 인사를 나눴던 프랑스에서 온 Thomas와 스페인에서 온 Javiber가 불을 지피고 있었다. 요리한 음식을 나한테 주길래 내가 맥주를 사가지고 돌아왔다(마시멜로는 아쉽게도 매진).

둘 다 자전거로 미국을 여행하는 중이었기에 서로 말이 되게 잘 통했다. 특히 Thomas는 나와 매우 비슷한 루트로 왔기에 같이 사막에서 개고생한 얘기를 함께 나누며 서로 맞장구를 쳤다. 나만 사막이 거지같앴던 게 아니구나.

마침 또 유로가 진행 중이기에 축구 얘기도 좀 하다가 밤이 깊어가 서로 연락처를 공유하고 각자 텐트에 들어갔다.

사람 기분이란 게 참 웃긴 것 같다. 여행 중 가장 짜증나고 우울했던 감정이 바로 다음 순간에 가장 기쁜 상태로 바뀌니 말이다. 어쨋튼 2주 동안 여기까지 오느라 내 자신에게 수고했다고 말하면서 잠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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