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평균인간 Dec 29. 2021

긴 머리 남자

세대공감 X - 이제야 홀로 서다

바람이 분다. 귀를 덮었던 머리가 살짝 들렸다 가라앉는다. 느낌이 어색하면서도 상쾌하다. 


최근 머리를 길렀다. 요즘 남자가 머리 긴 게 대수냐 하겠지만, 대한민국은 나에게 30여 년간 머리를 기르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법이 그렇다는 게 아니다. 유년시절을 떠올려 보면 그땐, 긴 머리를 하고 있었다. 초등학교 때도 그랬다. 언제부터 짧아졌을까? 중학교에 가면서부터다. 짧다 못해 하얀 살이 그대로 드러났고, 앞머리는 겨우 3미리였다. 고등학교 때 두발 자율화가 됐지만 '학교 자율에 맞긴다'라고 하더니 결국 '자유 없는 자율화'가 됐다. 여전히 옆머리와 뒷머리를 박박 깎은 일명 일본식 상고머리, 개성이라곤 1도 없는 바가지 머리였다. 대학은 한 학기 다니다 군대에 갔다. 제대하고 복학해서 한 3년 동안 기회가 있는 듯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학교 말고도 두발 단속을 하는 데가 하나 더 있었다.  집이다. 


정확히 말하면 아버지다. 아버지는 교사생활을 20년 넘게 하셨고, 퇴직한 후에도 집에서는 줄곧 나와 형에게 엄격한 선생님 이셨다.  90년대 중반쯤 TV 사전검열이 조금씩 느슨해지기 시작했을 때, 머리를 기른 남자 연예인이 나오거나 파마를 한 남자를 보면 꼭 한 마디씩 하셨다. "에이.. 사내 새끼 머리가 저게 뭐야..?" 어쩌다 내 머리가 조금 길게 자란 걸 보시면 '머리'는  '대가리'가 되었다.  "넌 대가리가 그게 뭐야?" "당장 가서 자르고 와". 빨간 외투를 사 입고 온 날은 "누가 그렇게 튀는 옷을 입으래? 가서 바꿔!" 하셨다. '튀면 안 된다.'가 아버지의 기준이었다. 아버지는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한국전쟁을 거친 험한 시대를 사신 분이다. '튀면 안 된다'가 어찌 보면 당연한, 생존을 위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난 머리를 더욱 단정히 하고 몇 차례 면접을 치른 뒤 취직을 했다. 머리는 슈트에 어울리는 말끔한 스타일. 그런 직장인의 모습으로 한 10년쯤 지내고 나니, 겨우 넥타이를 풀고 세미 정장이라 부르는 콤비 재킷을 입었고, 그걸 '쿨 비즈'라고 했다. 전혀 쿨하지 않았다. 그때도 머리는 기르는 건 눈치가 보였다.  윗사람들은 내가 경험한 학교와 군대보다 더 뭣 같은 경험을 한 사람들이다. 학교에서 군사교육을 받은 ROTC 출신을 더 우대해서 채용하던 시절이었으니, 당연히 개성 따위에 관대했을 리가 없다. 정말이지 개성이나 패션에 대한 이해라곤 1도 없는 직장상사에게 헤어스타일을 지적당하며 그렇게....


그렇게 또 10년이 지난 지금. 2021년 봄.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여름에 난 직장을 그만뒀다. 이제 정말 내 머리를 갖고 뭐랄 사람이 없다. 내 마음에 드는 적당히 긴 머리는, 더 마음에 드는 옷을 입게 하고 나에게 어울리는 장소를 찾게 한다. 이런 내 모습을 받아주지 않는 '직장'은 이제 가지 않을 거다.


몇 달이 지나자 주변에서 한 마디씩 한다. '느낌 있네요', '스타일이 달라지셨어요', '예술가 같으시네요'부터 '잘 어울려요' 같은 접대성 멘트까지. 고마운 분들이다. 그러나 사이가 가까워질수록 그들은 진실의 거울이 된다. "백수 됐다고 머리도 백수냐?" "뭐야? 베토벤이야?" 고등학교 동창들이다. 아무리 그래도 난 머리를 자를 생각이 없다. 머리 기를 용기도 없는 주제에 지적질이다. 부러워서 그러는 거다. 내 또래 중에서도 좀 튀는 헤어스타일이나 패션에 거부반응을 갖는 사람들이 제법 있다. 같은 세대로서 변명을 하자면, 그들도 군사정부 시절에 초. 중학교를 다니고 고등학교 땐 교련 수업이라는 군사훈련을 받았다. 그때의 선생님들은 교사이자 군인이었고, 교실은 군 막사와 같았다. 어느 정도 트라우마로 남아있다.


요즘 MZ세대를 보면 정말 부럽다. 마음껏 자기를 표현한다. 개성 있는 옷차림에 화장도 자연스럽다. 

그깟 머리 하나 기르기를 30년. 이렇게 오래 걸리다니. 어쩌면 긴 머리는 '그까짓'이라고 치부할 수 없는, 그보다는 훨씬 많은걸 의미할지도 모른다. 오랜 세월을 견디고 모두가 노력해서 얻은 '자유....'


아버지. 머리 말고 마음을 단정히 하고 살겠습니다. 편히 쉬세요.

그리고..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랑하는 아내가 그랬다.


 "오빠는 긴 머리가 어울려"

매거진의 이전글 내 탓이 아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