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의 'Football Mate'] 축구를 좋아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축구 전문가가 될 때까지.
알면 알수록 벅찬 감동을 선사하는 축구의 세계로 당신을 초대합니다.
2014년 9월 5일, 대한민국 축구대표팀에 사령탑에 생소한 이름을 가진 외국인 감독이 부임했다.
울리 슈틸리케, Uli Stielike
처음 대한민국 축구협회는 슈틸리케 감독이 아닌 판 마르바이크 감독을 선임 1순위로 정하고 협상을 했지만
마르바이크는 연봉 문제와 한국에서의 거취 문제 등의 이유로 감독직을 거절한다.
판 마르바이크 감독의 경우 어느 정도 충분히 검증이 됐다고 볼 수 있다. 2002년 네덜란드의 페예노르트를
이끌고 UEFA컵 우승을 이끌기도 했고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서는 '오렌지 군단' 네덜란드 대표팀을 이끌고
준우승을 이끌기도 했다. 하지만 마르바이크는 대한민국이 아닌 사우디아라비아를 선택했고
대한민국에는 울리 슈틸리케 감독이 부임한다. 그가 부임했을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슈틸리케가 누구지? 처음 듣는 이름인데?" 일반적인 반응들이 이러했다. 사실 저런 반응들을 보이는 것이
당연할 수밖에 없다. 슈틸리케 감독은 그만큼 유명하지도 않고 뛰어난 감독 경력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수 시절, 그는 독일의 전설 프란츠 베켄바우어의 후계자라는 말까지 들었던 가히 대단했던 선수였다.
슈틸리케 감독은 'SpVgg 케치'라는 독일 4부 리그의 작은 축구클럽에서 8살 때부터 공을 차기 시작했다.
그는 어릴 적부터 괜찮은 성장을 보이며 독일 청소년 축구대표팀의 리베로로 그라운드에서 뛰어다녔고
그가 18살이 되던 해 1972년, 당시 1.FC 쾰른에서 성공적인 감독생활을 보내고 보루시아 묀헨글라드바흐의
전성기를 이끌던 헤네스 바이스 바일러 감독은 케치에서 뛰던 그를 보고 그를 영입하기로 결심한다.
바이스 바일러 감독은 슈틸리케를 뮌헨글라드바흐로 데려와 자신의 팀에 금세 녹아들게끔 만들었다.
바이스 바일러 감독은 원래 젊은 선수들을 발굴해내는 데에 특출 난 능력을 가지고 있었고 슈틸리케 또한
그가 발굴한 독일의 재능 중 하나였다. 바이스 바일러 감독이 발굴한 재능들은 모두 묀헨글라드바흐의
레전드로 독일 축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패스마스터 '귄터 네처', 끈질긴 사냥개 '베르티 포그츠'
신이라 불린 사나이 '유프 하인케스', 덴마크 역사상 첫 발롱도르 수상자 '알란 시몬센' 등 어마어마하다.
여기에 슈틸리케까지 모두 묀헨글라드바흐의 황금시대를 열고 이끈 당시 최고의 스타플레이어들이었다.
슈틸리케는 묀헨글라드바흐에서 4년간 109경기에 출장하며 분데스리가 3회, 독일컵 1회 UEFA컵 1회 우승을 달성하며 자신의 커리어를 높이 쌓아갔고 1975년 9월 국가대표 데뷔전도 치르게 된다. 슈틸리케는 경기에서
뛰어난 활약으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고 언론과 전문가들은 '제 2의 프란츠 베켄바우어가 나타났다'며
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그러던 중 그에게는 절대 거절하지 못 할 기회가 찾아온다.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죽기 전에 가봐야 할 축구장 단연 1위,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산티아고 베르나베우는 평생 동안 구단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던 레알 마드리드의 레전드이자 구단주였다.
구단에서 베르나베우의 공로를 기리기 위해서 구장의 이름을 그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다.
베르나베우는 1943년부터 1978년까지 회장직을 맡았는데 그는 직접 팀의 중앙 미드필더에 활력을 불어넣을
선수를 찾고 있었다. 그때 베르나베우의 눈에 띈 선수가 바로 울리 슈틸리케다.
사실 베르나베우는 슈틸리케의 팀 동료였던 '라이너 본호프'에게 관심을 가지고 묀헨글라드바흐를 찾았고
그는 그의 수뇌부들과 경기를 지켜보고 있었다. 당연히 모든 이의 시선은 본호프에게 쏠려 있었지만
베르나베우의 시선은 본호프가 아닌 슈틸리케를 향하고 있었다. 경기장에서 상대방의 플레이를 마치 부수어
버릴 듯이 활동적인 움직임을 보인 슈틸리케는 베르나베우의 시선을 고정시키는 데 성공한 것이었다.
결정했다, 우리는 본호프가 아닌 바로 저기 저 선수를 데려갈 것이야.
그렇게 슈틸리케는 레알 마드리드의 유니폼을 입게 됐고 선수생활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슈틸리케는 레알 마드리드에서 뛰는 8년 동안 '독일 전차'라 불리며 그라운드를 휘저었다.
1977/78 시즌을 시작으로 78/79, 79/80 시즌, 프리메라리그 3연패를 이뤘고 코파 델 레이 우승 2회,
또 리그컵 1회, 1985년에는 UEFA컵 우승까지 달성하며 그의 선수 시절 전성기를 보낸다.
물론 그에게는 훌륭한 동료들이 있었기도 했다. 잠시 그들이 누군지 알아보면,
난쟁이 헤더 '카를로스 산티야나', 부동의 레프트백 '호세 안토니오 카마초', 2010년 남아공 월드컵, 무적함대를 이끌고 스페인 역사상 첫 월드컵 우승을 거머쥔 '비센테 델 보스케' 등 많은 훌륭한 동료들이 뒷받침되었다.
슈틸리케가 당시 굉장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 또 있다면 그는 프리메라리가 올해의 외국인 선수상을
무려 4년 연속 수상했다. 이는 아직까지도 최고 기록이다. 그 뒤는 루이스 피구의 3년 연속이 최고다.
이는 얼마나 슈틸리케가 대단한 플레이를 펼쳤는지 짐작할 수 있게 된다. 그는 지금도 레알 마드리드에서
역대 최고의 선수들을 이야기를 하면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선수 중에 하나다.
그의 클럽 경력과는 다르게 '전차군단' 독일 대표팀과의 인연은 그리 좋지는 못 했다.
1975년 처음 국가대표 데뷔전을 치르고 스타덤에 올라 대표팀의 부름을 종종받고 있었는데 그러던 중
슈틸리케가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했을 무렵 독일축구협회는 자국 선수들의 해외 이적을 반대하며 독일 밖으로
훌륭한 자국 선수들이 빠져나가는 것을 막으려고 애쓰고 있었다. 독일축구협회는 해외에서 활약하고 있는
선수들을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 엔트리에서 모두 제외했다. 당시 미국 MLS의 뉴욕 코스모스에서
몸 담고 있던 프란츠 베켄바우어조차도 제외되었으니 파장은 굉장히 컸다. 하지만 78년 월드컵에서
실패를 맛보고 독일은 해외 이적에 대한 대표팀 발탁 제한을 폐지하고 다시금 선수들을 불러들였고
이후 1980년 이탈리아에서 개최된 유럽 축구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을 거머쥐었다.
그리고 2년 뒤 슈틸리케는 전차군단의 일원으로 스페인 월드컵에 참가하게 된다.
독일은 승승장구하며 4강에서 '레블뢰 군단' 프랑스를 만나게 되는데 이 경기는 많은 축구팬들에게
한 편의 스릴러 영화로 남아있다고 이야기하곤 한다. 두 팀은 전후반 45분을 1-1로 비기며 연장전으로
돌입했고 프랑스가 역전골에 쇄기골까지 기록하며 스코어는 3-1이 된다. 하지만 독일은 집념으로 다시
만회골과 동점골을 기록하였고 3-3으로 승부차기에 돌입하게 된다. 이때 승부차기에서 키커로 나서게 된
슈틸리케는 득점에 실패하고 주저앉아버린다. 하지만 이후 프랑스의 키커들을 당시 독일의 골문을 지키던
'토니 슈마허'가 막아내면서 준결승전으로 진출하게 됐다. 한편의 드라마와도 같던 경기로 독일 팬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경기로 남아있다.
독일은 결승에서 '카테나치오' 이탈리아를 만나 고전하였고 3-1로 패배하며 준우승에 머무르게 된다.
슈틸리케는 1984년까지 전차군단의 일원으로 42경기를 출장하였고 이후 후배들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
슈틸리케는 레알 마드리드를 떠나 스위스의 뇌샤텔 크사막스로 이적하게 된다. 뇌샤텔은 규모도 아주 작은
클럽일뿐더러 슈틸리케가 오기 전까지 '우승'이라는 단어는 그들 머릿속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슈틸리케는 뇌샤텔 크사막스와 함께 스위스 슈퍼리그 우승 2회를 이뤄내고 선수로서 은퇴를 선언한다.
그리고 그는 바로 스위스 대표팀에서 감독 경력을 시작하였고 약 3년간 지휘했지만 성적은 좋지 못했고
3년 뒤 뇌샤텔 크사막스의 감독으로 부임했지만 역시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 했다.
이후 독일의 만하임, 스페인의 UD 알메리아를 거치지만 실패했고 그는 독일 대표팀의 수석코치로 들어갔고
당시 독일 대표팀 감독 에리히 리베크는 슈틸리케를 아끼며 그에게 사사해주었다.
그는 수석코치 생활을 끝내고 독일 유소년 U-21팀을 맡았고 4년 동안 성공적으로 팀을 이끈다.
이후 U-20, U-19 연령별 대표팀을 계속해서 이끌면서 그는 독일 유소년 선수 육성과 발굴에 큰 보탬이 된다.
슈틸리케가 발굴하고 육성했던 선수들은 독일 공격의 한 축을 담당한 '루카스 포돌스키'와 마리오 고메즈'
루이스 반 할의 남자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 세계 최고의 수문장 '마누엘 노이어' 등이 있다.
슈틸리케 감독은 2006년 독일 월드컵 이후에 코트디부아르 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하였고 디디에 드로그바,
살로몬 칼루, 콜로 투레 등을 필두로 팀을 성공적으로 이끌지만 2년 뒤 아들의 갑작스러운 건강문제로 인해
안타깝게 사임하게 된다. 이후 스위스의 FC시옹, 카타르의 알 아라비를 거치지만 큰 성공을 보지 못 했다.
그리고 2014년 9월 7일,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감독으로 부임하여 4개월 만에 2015년 AFC 아시안컵
준우승의 성과를 거두었고 2015 동아시안컵에서는 7년 만에 대한민국에 우승컵을 안겨주었다.
전술적인 면에서는 역시 수비수 출신 답게 안정된 수비를 바탕으로 빌드업이 이루어지는 공격 전개를 주로
사용하며 이를 대한민국 축구 대표팀에 성공적으로 안착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사실 슈틸리케 감독은 AFC 아시안컵이 끝나고 이집트 대표팀으로부터 더 좋은 조건의 감독직 제안을 받았지만
그는 대한민국에 남았다. 그리고 그는 대한민국이 자신의 커리어의 종점이라고 얘기했다.
슈틸리케는 처음부터 진심과 열정을 보이며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는 유소년뿐만 아니라 한국의 여자축구까지
거론하며 진정으로 대한민국의 축구 발전을 염원하는 사람이었다. 그 열정과 진심에 대한민국 축구협회는
슈틸리케가 최고의 선택은 아니라도 한국 축구의 변화와 발전에서는 충분한 역량을 가졌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확실히 그 열정과 진심을 보여주고 있다. 슈틸리케 감독은 무엇보다 많은 선수들에게 기회를
부여하려고 하고 K리그 소속의 젊은 선수들을 대거 중용하며 이정협, 이재성, 황의조, 권창훈 등 앞으로
대한민국을 이끌어갈 보석들을 캐고 있는 중이다.
슈틸리케의 대표팀은 현재 진행형이다. 2018년 러시아 월드컵까지 계약이 돼있는 만큼 그로 인해 한국 축구가발전하고 변화되는 것은 계속해서 진행 중이라는 것이다. 한 가지 바라는 점이 있다면 그가 처음에 세웠던
그의 원칙과 철학을 변하지 않고 지켜내면서 팀을 이끌었으면 좋겠다.
“선수들의 마음으로 들어가 영혼을 울리고 싶다. “
선수들의 마음뿐이 아닌 대한민국 축구 팬들의 영혼까지 울려줄 수 있는 전설이 되기를 빌어본다.
슈틸리케, 우리에겐 생소했던 그 이름이 머지않아 거스 히딩크 감독처럼 우리의 기억뿐만 아닌 마음속에
뿌리내릴 수 있는 이름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대한민국 축구 대표팀의 성공을 기원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