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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건해 Jan 20. 2016

나는 카우치 포테이토가 되고 싶다



'카우치 포테이토Couch potato’라는 단어가 있다. 카우치, 즉 소파에서 감자칩을 먹고 TV를 보며 시간을 죽이는 사람, 혹은 소파에서 주로 정크푸드를 먹으며 감자처럼 뒹구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인데, 여기에 딱 맞는 번역어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소파라는 건 거실에 있으니 자기 방에서 나오지 않는 ‘히키코모리’도 아니고, 소파에서 거의 움직이지 않으니 집에서 나오지 않는 ‘방안퉁수’도 아니다. 아무튼 그렇게 소파에 앉아서 움직이지 않고 칼로리가 높은 음식만 먹어서 살이 찌고, 살이 찐 만큼 더더욱 소파에서 떠나지 못하게 되어 리모컨만 쥐고 사는 삶은 그리 바람직한 삶은 아닐 거라고 나는 생각해 왔다. 사람은 늘 생산적으로 살면서 자기가 소비할 콘텐츠를 진취적으로 찾아 나서야 한다는, 꽤나 건방진 모토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에 짧은 기간이지만 스스로 이 카우치 포테이토 생활을 체험해보니 이게 웬걸, 이렇게 멋진 생활이 없었다. 일단 소파라는 게 참으로 멋진 물건이다. 편하기로 따지면 당연히 침대가 더 편하겠지만, 소파는 사람을 무턱대고 잠의 세계로 끌어당기는 힘이 덜하다. 침대에 앉으면 원하든 원치 않든 마음으로는 안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이윽고 몸이 정직하게 이불을 덮고 누워 잠들어버리고 마는데, 소파는 그렇지 않아서 퍽 산뜻한 것이다. 침대가 ‘사실은 처음부터 이러고 싶었던 거 아니야?’라고 말하는 육체파라면 소파는 ‘표가 생겼는데 영화 안 볼래?’라고 말하는… 아니, 이런 비유는 그만두자. 아무튼, 침대에 몸을 기댄다는 것은 밤의 세계에 한 발을 들여놓는 것이나 다름없어서 정말 자고 싶은 게 아니라면 피하는 게 낫다. 그런 한편 소파에 앉는 것은 의도가 무엇이든 간에, 설령 그것이 밤이라도 낮의 세계에 머물러 있다는 느낌이 들어 좋다. 


그래서 소파에 앉으면 무얼 하면 좋은가? 웹서핑을 하거나 책을 읽으면 진정한 카우치 포테이토라고 할 수 없다. 당연히 TV를 켜야 한다. 사실 내가 카우치 포테이토를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된 데는 스마트 TV와 IPTV가 도입된 탓이 크다. 보던 방송이 끝나면 무작정 채널을 돌려대야 했던 과거와 달리 이제는 수많은 채널 중에서 원하는 것을 고를 수도 있고, 그 자리에서 VOD를 구입해서 볼 수도 있게 됐기 때문이다. 거기에 USB를 연결할 수도 있고 심지어 웹서핑까지 할 수 있다. 이쯤이면 충분히 진취적인 소비 방식이다. 더 이상 바보상자가 아니다. 바보상자라면 똑똑한 바보상자다. 


소파의 유혹은 침대보다 강하다. 소파에 누우면 금방 일어날 수 있을 것 같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소파에 느긋하게 앉아서 보고 싶은 영화를 연달아 틀며 아이패드로 게임을 한 감상은, 부끄럽지만 ‘평생 이러고 살면 좋겠다’는 것이다. 공익광고조차 PC모니터가 아니라 대화면으로 틀면 재미있으니 영화라면 말할 것도 없다. 보지 않고 대충 들으며 게임같은 딴 짓을 해도 재미있다. 과자와 맥주를 곁들이면 더할 나위가 없다. 이건 현대의 극락이다. 그런데 방에서도 똑같이 할 수 있는 짓인데 어째서 소파에서 하면 더 재미있는 것일까? 


방과 거실을 전전하며 탐구를 거듭한 나는 이런 결론을 내렸다. 소파와 거실에는 거기 딸린 공간만큼의 자유가 있기 때문이다. 하는 짓도 똑같고 엉덩이도 항상 소파에 붙어있더라도 소파에는 앉아도 되고 누워도 되고 엎드려도 된다는 자유가 있고, TV와 소파 사이의 공간은 딱히 사용하지 않더라도 자유를 내포한 공간이다. 그리고 그 공간이 더 넓은 야외나 카페보다 더 좋은 것은 내가 장악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방안에 있을 때에 비해 자신의 영역이 압도적으로 확장되는 것이니 좋지 않을 수가 없다. 


이런 거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그런 장악된 공간이고, 다음이 넓고 편하지만 사람을 빨아들이지 않는 소파고, 그 다음이 TV인데, 거기에 정크푸드와 느긋한 시간까지 덧붙여야 비로소 카우치 포테이토가 탄생한다. 일종의 멸칭처럼 쓰는 단어지만 사실은 대단한 것이다. 여기서 정크푸드 말고는 자신이 원할 때 손쉽게 확보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다. TV까지도 그리 어렵지 않게 구할 순 있지만 공간을 충분히 활용할만큼 큰 TV는 적잖이 비싸다. 좋은 소파는 TV 이상으로 구하기 힘들고, 지속되는 공간적 시간적 여유를 구하자면 끔찍할 정도로 막대한 비용이 든다. 카우치 포테이토라고 우습게 볼 일이 아니다. 지속만 가능하다면 카우치 포테이토는 현대 인류의 꿈이나 다름 없는 것이다. 


아무튼, 카우치 포테이토 생활은 퍽 좋은 경험이었다. 소파에 누워 영화를 보기도 하고, 책을 읽기도 하고, 노트북으로 작업을 하기도 하고, 대충 만든 밥을 먹기도 하고, 게임을 하기도 하고, 낮잠을 자기도 했으며, 심지어 맥주와 찐 감자를 먹으며 “토토로"를 보기도 했다. 이거야말로 카우치 포테이토 그 자체다. 그리하여 카우치 포테이토란 참으로 멋지구나 하고 동경하게 되었지만, 가족과 함께 살면 가족과 함께 사는 대로, 혼자 살면 혼자 사는 대로 카우치 포테이토가 되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런 여유를 돈으로 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예전에도 적었지만, 몇 년 전에 여럿이 리조트에 놀러간 적이 있다. 아침에 남보다 먼저 일어난 나는 아무도 없는 거실로 나와 TV를 켜고 아침 햇살에 위스키를 비추어 보며 소파에 길게 누워 로마 귀족처럼 사치스럽고 바보 같은 시간을 즐겼는데, 그 순간은 아마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나는 또다시 그런 카우치 포테이토가 되고 싶다. 새해에 갖기에는 참으로 나태한 소망이지만.


2015.01.07.



-후기


어휴, 작년에는 이런 글을 썼군요. 그런데 민망하기 짝이 없습니다만, 카우치 포테이토가 되고 싶다는 소망은 여전히 갖고 있습니다. 소파에 누워서 영화를 한 두 세 편 보고, '아, 뭐 볼 거 없나' 라고 투덜대면서 채널을 돌려대고 싶습니다. 그러면서 베이핑을 하고 감자칩과 맥주를 먹는 거죠. 극락이 다른 데 있는 게 아니에요. 소파와 침대와 이불 속에, TV 화면 속에, 맥주병 속에, 감자칩 통 바닥에  있는 겁니다. 


써놓고 보니 멋진 말이군요. 자서전을 쓰면 적어둬야겠습니다.


행복은 감자칩 통 바닥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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