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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니엘 Jan 05. 2019

마이쩌우에서 어린 시절로 돌아가다. (하노이 근교여행)

베트남 한 달 살기 Day 9

초등학교 때까지 서울의 정릉이라는 곳에 살았다.

지금은 곳곳에 아파트가 들어섰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여느 시골과 같은 그런 동네였다.

어른들은 우스갯소리로 종점이 있거나 국립공원과 인접한 동네는 험하다고 얘기를 했었다.

그러면서 정릉은 종점도 있고 국립공원도 있으니 어마 무시한 곳이라고 장난 반, 진담 반으로 말씀하셨던 기억이 난다.


그곳에서는 사계절을 오감으로 느낄 수 있었다.


겨울 동안 꽁꽁 언 개울물이 녹아내리는 것을 보고 미리 봄이 온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반쯤 녹은 얼음 사이로 투명한 물이 졸졸 흐르는 소리가 좋았다. 일 년 중 이때만 들을 수 있는 소리였다.

마치 얼음 안에 새로운 세상이 존재하고 있는 것 같았다.

가는 길마다 야생화가 만개하는 것을 보고 봄이 왔다는 것을 느꼈다.

봄이 오면 마치 온 동네가 겨울잠에서 깨어난 것 같았다. 집 앞 개울에서 빨래하는 사람도 많아지고 야외에 나와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여름의 시작은 대개 비와 관련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여름은 한바탕 비가 그동안 쌓였던 개천의 이끼를 씻어주는 일로 시작되곤 했다.

이내 날씨가 무더워지고 얼음을 동동 띄운 콩국수를 먹고 있노라면 여름이 왔다는 것을 실감했다.

바로 앞에 개천이 있었던 우리 집은 장마철이면 윗동네로 대피해야 했다.

그 귀찮음과 약간의 무서움을 견뎌내면 구석구석 깨끗이 샤워한 개천이 나와 친구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여름방학이면 그곳에서 살다시피 했다. 아침을 먹고 수영복으로 갈아 입고 바로 앞 개천으로 갔다. 매일매일.

신나게 수영을 하다가 추우면 여름 태양빛에 달구어진 바위 위에 누워있으면 되었다.

동네 친구들이 삼삼오오 모여들고 다이빙도 하고 숨 참기도 하면서 입술 파래질 때까지 놀곤 했다.

근처 종점 슈퍼에서 사 먹는 컵라면은 어떤 과자나 아이스크림보다도 맛있었다.

슈퍼에서 뜨거운 물을 붓고 흘러넘치지 않게 개천으로 돌아가 먹었다.

그게 세상 가장 맛있는 라면을 먹는 방식이었다.

뜨거운 물을 부은 사발면을 가져오는 잠깐의 이동 거리가 정릉에서 시내까지 나가는 거리처럼 느껴졌다.


가을은 무언가 슬픈 계절이었다.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시기가 개학일과 맞물려서 그랬던 것 같다.

그때는 학교 가는 게 죽기보다 싫었다. 밀린 여름방학 숙제도 해야 하고 개천이라는 지상낙원과 결별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가을이면 어김없이 산이 옷을 갈아 입고, 사방이 밤톨 천지였다.

파란 하늘은 잠자리의 놀이터가 되었다.

학교 앞 문방구에서 잠자리채와 망을 사서 잠자리를 잡으러 다니는 것이 나의 낙이었다.

잠자리채가 없어도 그만이었다. 빨래 줄에 살포시 앉은 잠자리에게 숨죽이고 다가가 가위 모양의 손으로 잡으면 되었다.

꼬리가 빨간 것은 고추잠자리.

실같이 가늘어서 실잠자리.

학년이 올라감에 따라 머리가 제법 커지면서 흔하게 보는 잠자리들은 나의 관심을 더 이상 끌지 못했다.

왕잠자리나 이름은 기억이 안 나지만 청색 잠자리를 잡는 날에는 기분이 좋았다.


어렸을 적 겨울은 춥기보다는 오히려 따뜻했다. 겨울 잠자리가 제일 포근하고 따뜻했다.

밖에서 한창 놀다가 집에 들어오자마자 이불 안으로 들어가면 그렇게 따뜻할 수가 없었다.

내복과 옷을 몇 겹씩 껴입고 밖에서 놀다 보면 땀이 나, 파카를 벗어던지고 놀곤 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집 앞 처마에 제각 다른 모습으로 자리를 잡은 고드름을 보는 재미가 있었다. 한겨울에는 꽝꽝 언 개천에서 썰매도 타고 얼음 깨는 놀이로 시간을 보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물이었는데 그 위를 두발로 걸어 다닐 수 있다는 것이 매년 신기하게 다가왔다.

눈이 온 날에는 쌀포대나, 없으면 박스를 챙겨서 동네 절로 가는 경사길로 달려갔다.

바로 달려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다음 날에는 연탄재로 우리의 썰매장이 망가져 있기 일수였기 때문이다.

실컷 놀다 배가 고프면 동네 친구 무리 중 누군가가 감자나 고구마를 갖고 와 개천 한 모퉁이에서 불을 피워 구워 먹곤 했다. 눈이 와서 불을 피우는 데 한참 걸렸지만 말이다.


이때가 90년대 중후반의 일이다. 서울에서 이런 경험을 했다고 지인에게 말하면 도시에서 어떻게 그런 삶이 가능하냐고 믿지 않기도 한다.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세상이 더욱 빠르게 바뀌면서, 정릉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버튼 몇 개로 집 안 모든 것을 조종할 수 있는 아파트에 살고 싶었다.
근처에 피시방과 큰 슈퍼가 있고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곳에 살고 싶었다.

하늘이 내 소원을 들어준 건지, 새로 지은 아파트로 이사를 가고 한동안은 모든 일이 꿈만 같았다.

하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문득 초등학생 시절의 내가, 그리고 정릉이 계속 떠올랐다.

요즘은 그때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이따금씩 한다.


이곳 마이쩌우의 모습이 내 기억 속 그때, 정릉에서의 추억과 참 많이 닮아있다.

그래서 이곳을 또다시 찾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참 좋다. 이 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다.


(좌) 마이쩌우에서 마주친 골목 (우) 정릉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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