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한 달 살기 Day 3
오늘은 나에게 있어 친형제와 같은 베트남 친구를 만났다.
학부 때부터 이어진 인연이 어느덧 10년이 넘었다. 지금은 가정을 꾸리고 베트남에서 잘 나가는 투자 업무 담당 은행원이다.
숙소 앞으로 데리러 나온다고 하여 아침을 먹고 점심 약속 전까지 여유롭게 시간을 보냈다.
문자가 온다. 지금 나오라고. 검은 차를 찾으면 된다고.
저 멀리 검은 차가 보인다. 차량 유리 너머로 희미하게 반가운 얼굴이 보인다.
"형"
반갑게 맞아주는 친구의 목소리다. 이 친구는 나를 언제나 형이라고 부른다.
그 목소리가 항상 정겹다. 차 뒷좌석에는 작년에 봤던 그의 친구와 회사 동료도 보인다.
"염소고기 좋아해? 음... 한국에서 먹어본 적 있어?"
음식은 가리는 것이 없는 것 알지 않냐며, 먹어본 적은 없다고 답변했다.
"우리 오늘 하노이에서 가장 염소 고기를 잘하는 음식점에 갈 거야. 정말 맛있어."
10분 정도가 지났을까. 여기서 먼저 내리면 된다고 한다.
빨간색으로 칠해진 외관에 염소 머리 동상이 보인다. 염소고기 전문점답다.
그리고 익숙한 스티커와 포스터가 눈에 띈다. 거기에는 박항서 베트남 국가대표팀 감독의 얼굴이 새겨져 있다.
친구에게 물어보니 박항서 감독이 이 곳을 다녀가서 축하하는 기념으로 만든 것이라고 한다.
예약된 방으로 안내하는 종업원 옷에도 박항서 감독 얼굴이 새겨진 배지가 달려있다.
작년 이 곳에서 부분적으로 느끼긴 했지만 박항서 감독의 인기는 대단하다.
다른 테이블은 사람들로 꽉 차있다. 재미있는 사실은 점심시간임에도 불구하고 현지 전통주나 와인을 음식과 곁들이는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다들 양복을 입고 있는 것으로 봐서는 직장인이나 공무원인 것 같은데 이래도 되나, 싶다.
그때 여러 요리를 주문하던 친구의 물음이 들려온다.
"술 괜찮지?"
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친구로부터 나온 말이다. 내가 와서 더 신경 써주나 보다.
술을 좋아하고 여행 중인 나로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다. 낮 술은 여행자의 특권이라고 생각한다.
바로, 좋아!, 를 외쳤다.
"그리고 염소 피도 시킬 테니까 한번 먹어봐. 지금 아니면 언제 먹어보겠어."
이게 별미 중의 별미란다. 한국의 선지와 비슷한 것 같은데 주로 식전에 푸딩처럼 먹는다고 한다.
별로 내키지는 않았지만 성의를 생각해서 먹는다고 했다. 선지를 엄청 좋아하지만 그건 뜨겁게 먹을 때 얘기다. 차갑게 먹는 피는 왠지 당기지 않는다.
먼저 수육 무침과 비슷한 염소 무침과 염소 피, 그리고 술이 나온다.
친구가 먹는 방법을 알려준다. 염소 무침은 라이스페이퍼에 싸서 소스에 찍어먹고, 염소 피는 채소를 뜯어 넣고 라임을 그 위에 짠 후에 땅콩을 곁들여서 먹으라고.
친절하게도 직접 만들어서 내 그릇으로 올려준다. 너무 고맙다.
그리고 칡 내음이 나는 전통주를 따라서 바로 한잔하자고 한다.
"Cheers!"
술이 부드럽게 넘어간다. 기분이 조금씩 좋아진다.
계속해서 음식이 나온다. 염소고기 순대, 염소고기 수육, 채소 찜, 염소 통구이, 그리고 염소고기 샤부샤부까지...
음식이 입에 맞냐고 친구가 묻는다.
정말 맛있다고 한국에는 이런 음식 먹기가 힘들다고 받아친다. 그제야 친구는 안도한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말을 이어나간다.
"형이 베트남까지 왔으니까 최고 음식만 먹게 해 줄 거야."
너무 고맙다. 약간은 미안하기도 하다.
사실 여기 음식이 그럭저럭 먹을 만하지만 베트남 노점 음식보다 더 훌륭한 것은 아니다. 더 좋은 점이 있다면 깨끗하고 독실에서 우리끼리 밥을 먹을 수 있고 서비스가 좋다는 점 정도이다.
특히 염소 피는 성의를 생각해서 끝까지 먹었다.
굳이 이런 데를 데려오지 않아도 되는데,라고 몇 번을 생각했다. 그저 길거리에서 파는 국수 한 그릇이면 충분하다고.
약간의 취기가 돌 즈음 약 2시간의 점심을 마쳤다. 마음이 쓰여 이건 같이 더치페이를 하자고 고집을 피웠다.
친구가 주저하다가 못 이긴 척 말한다. (한화로 환산하면) 한 명 당 2만 원씩 내면 된다고.
그 자리에는 6명이 있었다. 점심 값으로 12만 원이 나온 셈이다.
한국이라면 얘기가 달라지겠지만, 여기 현지 물가로 치면 정말 비싼 점심이다.
괜히 나 때문에 큰 지출을 하게 되는 친구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마음이 편치 않았다.
내가 먹은 건 음식이 아니라 친구의 마음과 성의였다. 나를 어디로 데려가야 할지 고민하는 모습이 눈 앞에 그려졌다. 그 모습을 떠올리니 현지 서민들이 즐기는 식당에 가자는 말은 차마 할 수가 없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한국에 외국 친구가 올 때 고급 한정식 집을 (아니면 고급 장어 식당을) 데려가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라는.
외국에서 오랜만에 친구가 찾아올 때면 약속 날이 다가오기 전까지 어디로 가야 하나, 라는 고민을 종종 하게 된다. 내가 한국에 있는 한 최고의 대접을 해줘야지라는 마음으로.
국내 맛집 골목과 노포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현지인들로 우글거리는 곳을 데려가야지, 라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이 결정도 잠시, 사람들이 많고 위생이 별로 좋지 않아 불편해하지 않을까, 라는 걱정이 앞서게 된다.
생각을 바꾼다. 유명한 한정식 집을 찾는다. 가능하면 한옥 안에 위치한 곳으로.
이번 경험을 통해 갑자기 기억이 났다. 적어도 내가 만난 외국인들은 가본 식당 중 어디가 제일 좋았냐고 물으면 현지인들이 가득한 허름한 식당, 술집이 가장 좋았다고 했다.
<알쓸신잡>에서 김영하 작가가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얘기한 적이 있다. 전주 국제영화제 심사를 했던 김영하는 다른 외국인 심사위원들과 밥을 먹을 일이 많았다고 한다. 이들은 예상과는 다르게 중국집을 가고 싶어 했다고. 그래서 이들을 데리고 갔더니 홍상수 감독 영화에서 봤던 소주병과 ‘올드보이’에 나왔던 군만두를 엄청 좋아했다고 한다. 이유는 이렇다. 외국인 심사위원들이 한국에 왔더니 만나는 한국 사람마다 한정식 집이나 비빔밥 집으로 데려갔다는 것이다.
이들에게 잘못이 있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 한국 사람들은 최고의 성의를 표하고자 우리조차도 평소에 잘 먹지 않는 한정식 집이나, 전주에서 유명한 비빔밥을 대접한 것이다.
외국인 심사위원들도 이런 마음을 알아 쉽게 마음을 내비치지 못하지 않았을까?
마치 오늘 염소 고기 집에서 나처럼...
성의는 중요하다. 그 마음만으로도 기분 좋게 배가 불러온다.
하지만 성의는 만족에 비례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아무리 친한 친구 사이에도 대화가 필요한 것이 아닐까? 으레 짐작하지 않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