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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니엘 Jan 02. 2019

나는 이곳에서 친구와 절교하기로 결심했다

베트남 한 달 살기 Day 6  

이곳 베트남에 온지도 벌써 6일 째다. 엊그제 도착한 것만 같은데 거의 일주일이 다 되어간다.

단기 여행이라면 지금쯤 한국에 있을 시간이다. 

시간이 속절없이 빨리 간다. 

나는 지금 아주 오래된 카페에 앉아 있다. 시골 밤 같이 새카만 베트남식 블랙커피를 마시면서.


한참을 넋을 놓고 앉아있다가 나는 지금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지, 라는 생각이 스친다. 

무언가를 놓치고 있는 꺼림칙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아뿔싸. 


쓸데없는 강박이 또 시작되었다. 

강박.

나를 불행하게는 만드는 고질병이 다시 도진 것이다. 이놈은 내가 삶에 만족하는 하는 꼴을 못 본다. 

마치 가까운 사람이 잘되면 더 질투를 느끼는 사람들처럼. 


이 강박은 나의 의지와 목표라는 밥을 먹고 자란다.

사실 이곳에 오기 전에 '이번 여행 동안 해야 할 일'이라는 밥을 듬뿍 주고 왔다. 심지어 간식까지 원 없이 주었다. 그동안 배가 불러 조용했는지 몰라도 내가 준 밥을 에너지 삼아 다시 나를 괴롭히려 하고 있다. 


다독하기, 여행 에세이 쓰기, 업무 글 쓰기, 단편 소설 쓰기, 책 글 쓰기, 새해 개인과 업무 목표 세우기 등 한 상 가득 밥을 주었다. 

과식이 몸에 좋지 않은 것처럼 이는 다시 독이 되어 돌아왔다. 


다이어리를 펴고 지난 며칠의 일정을 복기해본다.


9시 즈음 기상

스트레칭, 명상, 차 끓이기, 아침 일기

샤워, 외출

11시 즈음 아침 겸 점심 식사

식당 근처 노천카페에서 독서

편한 의자가 있는 카페에서 멍 때리기와 글쓰기

다른 카페로 이동하여 맥주를 마시며 책을 읽거나 다른 종류의 글쓰기

7시 즈음 저녁 식사

숙소로 돌아가거나 아쉬운 날에는 길거리 맥주

샤워, 하루 정리

저녁 일기

책을 읽다 새벽 1시쯤 취침

하노이에 온 이후로 위와 같은 일정대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어제까지는 이 모든 게 너무 황홀하고 좋았다. 하루하루가 꿈만 같았다. 

모든 것에 만족할 즈음에 강박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그리고 내게 살며시 속삭였다. 


"힘들게 한 달이나 휴가를 내고 이곳에 왔는데 이렇게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서야 되겠어?"

"여기까지 와서 계속 늦잠 자고 그럴래? 이러다가 한 달 금방 간다."

"오랜 시간 카페에 있으면서 정확히 뭘 하고 있는 거야? 이러다가 이번 여행 목표 하나도 못 이루겠다...ㅋㅋㅋ"


아주 괘씸한 놈이다. 

이놈과의 인연은 이미 10년도 더 됐다. 어딜 가나 나를 졸졸 따라다닌다.

처음에는 좋은 친구라고 생각했었다. 

자기 계발에 한창 열심이던 20대에는 둘도 없는 친구였다.

그냥 만나면 이유 없이 좋은 친구가 아니라 나를 한 단계 성장하게 해주는 그런 친구.

서른에 접어들면서 이 친구와 멀리 하려 했다. 너무 가까운 사이가 아닌 적당한 선을 유지하는 친구가 되고자 했다. 

하지만 거리를 두려 할수록 이 친구는 나를 더 괴롭혔다. 우정이라는 덕목에 호소하며 마음을 아프게 하기도 하고, 때로는 감당할 수 없는 죄책감을 주기도 했다. 이제는 서로의 사이가 틀어져버려 여행 중에도 나를 괴롭히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여행 내내 한바탕 실랑이를 벌일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머리가 아프다.

이번 기회에 제대로 혼쭐을 내줘서 다신 나를 방해하지 못하도록 해야겠다.

이 참에 제대로 절교해야겠다. 

불쌍한 척해봐라! 관심조차 주지 않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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