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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다 Sep 11. 2018

여름의 세레머니

며칠 외출을 자제한 탓에 여름이 온 줄도 모르고 있었다. 지난 늦여름 구입해, 세 번 정도 착용하고 접어 둔, 반바지를 꺼냈다. 오늘 날씨를 검색하고, 머뭇거리다 반바지를 입기로 결심했다. 허벅지를 조금 웃도는 길이, 그 위에 긴 맨투맨을 매치했다. 어쩐지 땀이 나는 것도 같았다. 


매년 맞이하는 첫 여름날은, 누구에게나 다르다. 반바지를 처음 꺼내 입은 날, 배터리가 다 된 휴대용 선풍기를 충전기에 꽂는 순간, 내리쬐는 햇볕에 짜증스레 눈살을 찌푸리는 때. 그리고 겨울내내 몸을 꾸욱-누르던 극세사 이불을, 얇은 천 이불로 갈아끼우던 어제 밤이, 나에겐 올해 첫 여름 세리모니였다. 


지난 10월부터 극세사 이불을 덮고 잤다. 퇴근하면, 옷을 갈아입기도 전에 전기장판의 온도를 맞췄다. 어느 순간부터 몸을 으슬거리게 만드는 어떤 순간도 견딜 수 없게 되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 갈 때에도, 작은 전기장판을 포기하지 못한 건 그 때문이었다. 


8개월 간 나의 밤을 함께한 전기장판과 극세사 이불. 무거운 이불을 들추고, 끝자락을 맞춰 곱게 접었다. “이불 접어서 거실에 내놔.” 밤 사이, 천 이불을 꺼내던 나를 보며 엄마가 말했다. 극세사 이불을 침대 한 켠에 내어주고, 천 이불을 덮었다가 다시 내렸다. 그리고 꺼져있던 전기장판의 불을 켰다. 다시 누웠다. 아직도 몸이 으슬거렸다. 저만치 밀려나있던 극세사 이불을 끌어와 그 위에 덮었다. 그래도 따뜻한 기운이 돌지 않아 조금 슬퍼졌다. 


아침에 일어나, 엄마의 말대로 극세사 이불을 거실에 내놓기 위해 툭툭 털어냈다. 이렇게 무거웠나? 지난 시간, 내 고민의 순간을 내내 흡수했을 그 이불이 어쩐지 내가 들 수도 없을만큼 무겁게만 느껴졌다. 털어냈다고 생각한 고민들은 극세사 이불에 봉인된 채 흩어지지도 사라지지도 않은 것만 같았다. 이제야 인정할 수 있게 되었다. 숱한 고민의 밤이 어디에도 가지 않고 나의 곁을 멤돌았을 거라는 사실을. 거실 한 켠에 한 동안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저 분홍색 극세사 이불처럼. 그리고 언젠가는 비어져버릴 그 자리처럼, 결국엔 사라져버리게 될까.



-지난 6월, 여름의 초입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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