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이, 안티프리즈”
우면동에 있는 방송국에서 일할 때, 나를 이렇게 부르는 사람이 있었다.
매서운 눈매와 툭툭 던지는 말들이 가끔은 날을 세운 듯해 움찔하게 만들었던 사람.
나는 그 사람이 나를 그렇게 부를 때마다,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곤 그 사람도, 떨떠름히 웃고 나를 지나쳤다.
일주일, 3일 출근. 한 번씩 마주칠 때마다,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는 그 사람은, 나를 그렇게 불렀다.
검정치마의 노래 ‘antifreeze’를 좋아한다.
자소서 맨 밑, 나를 표현하는 문장을 적을 때, 안티프리즈의 가사를 적었다.
‘춤을 추며 절망이랑 싸울거야-’
절망의 순간에도, 춤을 추듯, 불행에 무너지지 말자고 다짐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내 삶에 따라붙는 우울에도 조금은 무뎌지는 듯한 착각에 빠지곤 했으니까.
최근 난 ‘모모’로 불린다.
미하엘샌드의 ‘모모’ 속 주인공의 무던하고 고요한 모습을 닮고 싶었다.
필명을 모모로 지은 것에는 그런 바램도 깃들어 있었다.
언제나 기복이 심하고, 그 기복을 남에게 비추길 머뭇거리는 난,
타인에게 나의 정체가 탄로나는 걸, 늘 못 견뎌했으니까.
“온갖 불행 너가 다 안고 있는 거 같아”
친구는 엉엉 거리며 우는 나를 보며 그렇게 말했다.
이상하다. 난 이런 종류의 인간을 그렇게 혐오했는데.
모모로 불리면서도, 모모가 될 수 없는 나.
어쩐지 스스로의 불행과 슬픔이 조금 우습게 여겨졌다.
내 삶은 비극인데, 타인이 보기엔 희극이라는 말.
안다. 그 말이 시시하게 들리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 왜 그 말이 자꾸 나를 따라붙는지.
지금 나를 총총 따라오는 모래성 같은 기분이 언젠가 무너져내리면,
그럼 새로운 모래성을 또 쌓아올리게 될까?
조금 더 견고하게, 누군가가 툭, 하고 쳐도 한번에 무너지지 않을만큼, 튼튼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