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만이 계절의 전부인 이곳에서, 비는 잦은 방문을 한다. 하늘은 파랗고 선명한데 땅에선 투둑투둑 빗줄기가 내린다. 수영장과 작은 정원이 마주 보이는 호텔 로비 카페에 앉아, 내리는 비를 바라본다. 언니가 추천한 ‘Suco de laranja (수꾸 지 라란자)’, 오렌지 주스를 마신다. 음료를 가져다준 직원이, 테이블을 가까이 당겨주곤 싱긋 웃는다. ‘오브리가다-’ 웃으며 답한다. 낯선 공간에선 작은 친절에도 온 마음을 빼앗긴단 말이 생각났다.
잘 들지 않는 와이파이에 공연히 사진첩을 들여다보다, 나의 2월이 겨울과 여름 사이에 걸쳐져 있음을 알아챈다. 지금껏 내가 살아온 계절은 뚜렷한 4개의 계절, 경계를 알 수 없을 만큼 차근히 다가왔다가 서서히 멀어졌다. 코트에 묻은 차가운 공기를 털어내며 “언제 또 이렇게 추워졌지?” 혼잣말 한 적은 여러 번 있었지만 봄에서 여름, 여름에서 가을, 가을에서 겨울, 또다시 겨울에서 봄. 일정한 흐름을 눈치채지 못한 적은 없었다.
그러니까, 겨울에서 여름, 이 낯선 계절의 흐름이 익숙할 리 없다.
한국에서 나의 여름은 일시적이었다. 언제든 멀어질 거란 확신으로 무더운 여름을 지났다. 열대야에 잠 못 드는 날엔 시간 너머에 있을 겨울을 상상했다. 세월이 흐르는 건 무섭지만 여름이 끝나길 바라는 모순은, 매일의 여름마다 저질렀다.
두 번의 짧은 연애를 지나면서, 그 모든 계절 속에 여름은 꼭 있었다. 때문에 내가 겪은 가장 무더운 여름은, 권태로운 연인과 영등포역을 걸으며 싸웠던 오후, 놓지 못한 손을 꼭 붙잡았던 때 자꾸만 흐르던 인중의 땀 같은 것, 그런 것들이다.
언제든 멀어질 거란 의심으로 사랑을 지나왔고, 여름의 끝에 있을 겨울 같은 사랑을 꿈꿨다. 그래서 나는 사랑에 최선을 다해본 적이 없다. 짧은 문자로 통보받은 이별과, 조건을 내걸었던 이별 사이, 모두를 금방 훌훌 털어내고 사랑이라 불렀던 이들의 나이도 금방 잊었다. 지루한 연애와, 그보다 더 지겨운 이별을 지나면서 어서 빨리 시간이 지나길 바랬으니까. 지루한 여름이 끝나고 언젠가 겨울이 올 것을 알았으니까.
2월이 지나고 3월이 되어도 이곳에 있을 난, 또 다시 여름 속에 있다.
하지만 여전히 나에게 영원한 여름은 없다.
그래서 나의 오늘 하루는 끈적하고, 무덥다. 그래서 또 외롭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