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손으로 암벽을 등반하는 한 사내에 관한 다큐를 봤다. 거의 절벽에 가까운 914m의 암벽을 오르는 그 사내의 몸에는 안전하게 그를 지켜 줄 끈과 한 가락이 잘린 두 개의 손뿐이다. 그는 그동안 단련해온 손가락의 힘으로 미세하게 튀어나온 바위의 자락을 잡고, 조심스레 발을 옮긴다. 잘 옮겨졌다 싶을 때 몸에 끼워뒀던 갈고리를 자신의 위치의 홈을 파 건다. 그 자린 그가 정복한 한 구역이 되고, 그는 또 몇 차례 같은 행위를 반복한다. 어쩐지 그가 이 세계에서 존재하는 사람 중 가장 작은 사람 같아 보였다.
그때 그의 숨소리와 손가락의 감각, 옮겨지는 다리의 신중함에 대해 생각해본다. 그는 상처 난 손을 붕대로 감으며 말한다. “암벽을 등반한다는 건, 내 손에게 하는 가장 힘든 일이에요. 손에 상처가 나면 밤 사이 두 번은 일어나 붕대를 갈아줘야 해요. 면도날을 쥐고 있은 것과 같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주 오랜 시간 암벽을 오르고, 미끄러지고, 또다시 바위의 자락을 잡아야만 하는 건 그 마음은, 대체 어떤 마음일까?
예전에 좋아하던 로코 드라마의 남자 주인공은, 옛 연인에게 이별을 고하며 이렇게 말했었다. “사람들은 죽을 걸 알면서도 살잖아.” 사랑의 끝은 결국 이별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던 시절에도, 이 말은 슬프게 들렸다. 그리고 언젠가 끝날 걸 알면서 내가 쉬지 않고 하는 행위들에 대해 생각했다. 누군가에게 마음을 주고 관계를 맺고 그 사람과 내가 평생 이러질 거란 착각들. 하지만 이런 행위들은 끝이 있는 것이라기보단 ‘반복’되는 행위에 가까웠다. 끝을 잡고 보니 사실은 영원의 맹세의 맨 앞자락에 와있었다. 그리고 또 관계의 마지막, 끝을 마주친다. 마음이 단단해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끝은 반복이 된다. 우린 또다시 상처받고 만다.
몇 년간의 탐험, 그리고 19일을 커다란 암벽에서 지내고, 결국에 그는 산 정상에 오른다. 1000미터 달리기를 해서 오를 수 있다면 진작 정상에 올라, 19일째 취식을 하고 있을지도 모를 시간이었다. 나는 그의 암벽등반이 끝나지 않았음을 알아차린다. 그는 말한다. “이곳이 저에겐 안전한 곳이고 삶에 대처하는 방식입니다” 지난 시간 내가 수차례 반복해온 모든 관계와 상처들, 그리고 또다시 맺는 관계들의 반복은 어쩌면 불완전한 영원을 감지한 나의 방어책이고 삶의 대처 방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우리는 죽을 걸 알면서도 살고, 이별을 알면서 또 다시 사랑을 반복하고, 끝이 있음에도 또 다시 암벽 등반을 준비하는 존재들이니까.
반복된 모든 것들이 남긴 찌꺼기들은 밤마다 침대에 누워 있는 나를 찾아와 내 몸을 깔아뭉개고 그것도 모자라 온 머릿속을 어지럽혀 애꿎은 이불을 차게 만들지도 모른다. 언젠가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그다음엔 발을 가지런히 모아 그 사이에 이불을 꽁꽁 묶어두고 또 한 번 다짐하는 내가 있다. 앞으로 다시는 누구에게도 마음을 주지 않을 거야. 절대로! 반복의 반복을 거듭하는 어리석은 내가 있다. 어쨌든 내가 택한 삶 속의 내가 있다. 끊임없이 오르는 그 사내처럼, 이루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들, 끝이라 생각하는 것들을 향해, 그렇게 반복해 나아가는 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