덜렁이의 하루 Ep. 4 <10월의 명장면>
책장에 순서 없이 뒤죽박죽 꽂혀 있던 책을 가리키며 엄마는 으름장을 놨다. 곧 있으면 이사한 지 17년이 되는 집의 도배와 장판을 새로 하기로 한 참이었다. 그전까지 200권에 달하는 이 책들 좀 어떻게 하라는 거였다. 마감 기한에 쫓기는 작가처럼, 정해진 기한 안에 책 정리를 해야만 하는 미션이 주어졌다.
책을 정리하려고 마음먹은 뒤 가장 먼저 생각한 방법은 기부처를 알아보는 것이었다. 지역 도서관부터 작은 중고 서점까지 생각해 봤지만 이 많은 책을 가지고 갈 만한 방법이 떠오르질 않았다. 게다가 상태가 안 좋은 책들도 꽤 되어서, 기부하기엔 좀 그렇고. 깊은 고민에 빠진 나에게 친구 ’예‘가 얼마 전 중고 책 사이트에 스무 권의 책을 팔았단 얘길 전해왔다. 역시 그게 가장 빠르고 깔끔한 정리가 되려나. 이거 얼마 되지도 않을 거 같긴 한데···.
그렇게 고민만 하다 하루가 갔다. 도배장판 날이 코앞으로 다가오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중고 책 사이트 앱을 켜고, 정리하기로 결심한 책의 숫자 100권을 입력한 뒤 팔기 버튼을 눌렀다. 내일은 쉬는 날이니, 목요일 오후에야 택배 기사님이 책을 가지러 올 터였다. 얼른 정리를 해야겠다. 책에 쌓인 먼지를 일일이 털어내고 분류했다. 책 100권을 박스 여섯 개에 나눠 담아 현관에 내놨다. 목요일 오후, 점심시간이 지나고 나가보니 박스로 가득 찼던 현관 앞이 깨끗해져 있었다. 마음도 같이 개운해졌다.
산뜻하게 흘러가던 그날 저녁, 요즘 열심히 보고 있는 예능 프로그램을 보기 위해 OTT 어플을 켜고 침대에 누워있을 때였다. 톡이 하나 도착해서 무심코 봤다가 소리를 꽥 질렀다. 한강 작가가 올해의 노벨 문학상 주인공이라는 소식이었다.
예상치 못한 희소식에, OTT 어플을 주저 없이 끄고 기사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모두가 나처럼 흥분해 있었다. 모두가 한강 작가에 대한 이야기와, 책에 대한 애정을 쏟아냈다. 아침엔 분명 멀쩡했던 온라인 서점 어플은 갑작스럽게 몰린 많은 사람들 때문에 트래픽을 앓고 있었다. 전례 없던 풍경이었다. 작은 휴대폰 화면 위로 문학이 넘실거렸다. 사랑이 넘실거렸다. 잠 못 드는 밤이 이어져도, 하나도 피곤하지 않았다.
그러다 떠오르는 하나의 생각에 이번엔 ’헉‘ 소리가 절로 튀어나왔다. 손수 싸서 보낸 100권의 책들이 쭉 떠올랐기 때문이다. 기억을 되감기 하는 머리가 분주하다. 책 100권을 정리하던 내가 책장 한 가운데 꽂혀 있던 책 <검은 사슴>을 발견한다. 오늘 노벨 문학상을 받은 한강 작가의 책이다. 그것도 이미 절판된 예전 버전의 책이라는 사실을, 과거의 나는 알지 못하고 경거망동이다.
“(과거의 나) 씁. 이거 보낼지 말지 고민되네. 다 읽기도 했고, 책도 꽤 멀쩡한데 그냥 보낼까?”
물어볼 이도 없는 방 가운데서, 1분가량 서서 고민한다. 그리고 그다음 장면은. 아, 생각이 나질 않는다. 결국 그 책을 박스 안에 넣었나? 안 넣었나? 당장 알고 싶어진다. 나머지 100권이 있는 곳에 가서 책을 뒤적거린다. 없다. 여기도 없다. 여기도...없다! 기어코 네가 <검은 사슴>을 팔았구나. 그거 얼마나 받는다고. 노벨문학상 발표 날인지도 몰랐던 지금의 내가 과거의 나를 꾸짖는다. 어쩐지, 오랜만에 빠릿빠릿하게 행동한다 했다. 꼭 이렇게 미루지 않고 나서는 날엔 후회할 일이 생기곤 했던지라, 억울해도 별 수 있나? 좋아하는 작가의 책을 소중히 하지 않은 나의 탓이다.
당분간 한강 작가님의 책을 구하려면 어렵겠지. 도서관도 다 풀 예약이다. 머리를 셀프로 쥐어박으면서도 실실 웃음이 났다. 느닷없이 들이닥친 문학 열풍이, 나에게도 기분 좋은 바람을 불어 넣는 것만 같았다. 종일 일하느라 땀을 훔치는 뉴스 속 인쇄소 직원들의 미소도 나와 데칼코마니다.
자주 들르던 나의 동네 책방 풍경도 하나둘 떠올려 본다. 마침 사고 싶은 책이 있으니 동네 책방에 가야겠다. 갈 때마다 시간이 고요하게 흐르는 것 같은 ‘너의 작업실’도 좋고, 겨울이면 창밖으로 동네 주민들이 눈싸움하는 풍경이 훤히 보이는 ‘라비브북스’도 좋겠지. 책에 둘러싸인 10월의 명장면을, 오래 마음 안에 저장해두고 싶다.
⊙ 글 : 다다 (인스타그램 @ddidawn)
⊙ 그림 : 서콩 (인스타그램 @se0c0ng)
⊙ 덜렁이의 하루 (인스타그램 @dadashou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