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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나혜 Jun 05. 2023

그들은 왜 '농부'를 선택했을까?

실천문학사가 낸 설문조사에 '농부'라는 단어가 등장했다.  

  ‘단어’는 사용되는 순간 특정한 의도를 갖는다. 특히 ‘말’ 보다 ‘글’에서 더 큰 의도를 갖는다. 글은 수정의 시간이 허락되기 때문이다. 글쓴이는 자신의 입장에 설득력을 높여줄 단어를 고를, 충분한 시간을 갖는다. 그래서 상대가 고른 단어를 살펴보는 건,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된다.  

실천문학사 <출판의 자유권리 억압 사태에 대한 원인 분석 설문조사> 캡쳐


#5번 문항에 등장한 단어, ‘농부’


 '농부'라는 단어가 보인다. 지난 5월, 출판사 ‘실천문학사’는 <출판의 자유권리 억압 사태에 대한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그들은 설문지 5번 문항에 ‘농부’라는 단어를 넣었다. 그들은 왜 농부라는 단어를 선택했을까?



#설문지가 나오기 전


  약 5년 전, 시인 고은의 반복적 성범죄 사실이 밝혀졌다. 그는 활동을 멈추기 직전까지도, 성범죄 사실에 무반성적 태도를 일관했다. 그만큼 문학계의 권력자였다. 대중과 언론은 그를 감싸고 있는 수만 겹의 보호막에 분노했다.


  그러던 지난 1월, 실천문학사는 고은의 신작을 출간하겠다는 계획을 내놨다. 실천문학사는 출판사의 창간역사를 함께한 고은을 옹호해야 하는 위치에 있었다. 고은 작가의 입지가 출판사의 지위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논점 흐리기 전략


  설문지에는 ‘농부’, 정확히 말해서 죗값을 치른 농부가 등장한다. 오래전부터 ‘농부’는 여러 매체에서 성실하고 순박한 사람의 이미지로 소비되어 왔다. 이러한 농부 이미지로, 출판사는 고은을 권력형 성범죄로부터 멀리 떨어뜨려 놓고자 한다. 고은의 실추된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농부’라는 단어를 선택한 것이다.


  여기에 ‘출판의 자유권리 억압 사태’라는 설문지 이름으로, 자유와 억압을 강조한다. 고은의 권력형 성범죄에 따른 비판을 ‘출소자의 사회적응’이나 ‘출판사의 자유’와 같은 뜬금없는 쟁점으로 옮기려는 시도다. 결과적으로 그들의 시도는 권력형 성범죄가 뿌리 박히는 데에 기여하는, 유해한 전략이다.



#의심 없이 넘기는 순간을 목표로


  실천문학사의 고은 복귀 프로젝트. 이 사건은 기득권층의 일상적 강간문화와 그들의 권력 유지가 어떤 식으로 이뤄지는지를 제대로 보여준다. 이에 사람들은 다시 한번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어떤 단어는 해로운 의도로 쓰여진다. 우리가 지키려 했던 대상과, 투쟁하고 있는 문제들로부터 우리를 멀-리 떨어뜨릴 의도다. 그들은 우리가 의심 없이 받아들여왔던 강한 서사들이 적극 활용한다. 그리고 우리가 그들의 논리에 끄덕이며 지나치는 순간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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