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는 사람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방법
별안간 침대 아래 내팽겨쳐져있던 일기장을 열고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오래된 이야기를 맞이하는 마음에 불경스런 마음이 설 자리는 없지만 그렇다고 오래된 기억을 소중하게 생각하지도 못하고 읽는다. 내가 펼친 곳은 처음도 끝도 아닌 어중간한 가운데. 그냥 그렇게 별 뜻없이 열어제껴 읽어보고 싶었다. 펼친 페이지에는 역시나 당시 상황에 대한 볼멘소리들이 여럿 적혀있었다. 하지만, 어쩌다 찾아간 카페의 바닥마감과 인테리어디자인을 높이 평가하는 것을 보니 내가 마냥 부정적인 사람만은 아니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렇게 차디찬 냉소와 온화한 성정사이 어디쯤에서 2017년을 기억해본다.
느닷없이 내가 얼마를 벌어야하는지 숫자를 동원해 계산을 한 구절인데 제법 현실적으로 계산을 했다. 그리고 다 더한 합을 열두배 한 값을 '마지노선'이라 이름 붙였다. 근데 이 '마지노선'이 지금 내가 받고 있는 연봉보다 딱 100만원 적다. 내가 이쯤 벌 수 있으리라고 알기라도 했단 말인가?
일기장을 닫고 곰곰히 생각해봤다. 그리고 삶의 많은 부분들이 미해결 난제로 남아있음을 되새긴다. 해묵은 문제점들이야 뭐, 살빼기, 내 짝 찾기, 관계에서 행복찾기 같은 것들. 결코 쉽게 사라질 것 같지 않은 여러가지 문제점들이다. 하나 하나 되새기고 톺아본다. 아마도 일기장을 열기 전부터 갖고 있었을 내 자신에 대한 냉소와, 더불어 지금은 더이상 일기를 써내려가지 않는 이유가 되었을 권태감이 피부로 와닿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6년동안 열심히 공부한 건축이라는 학문을 벗어나 느껴야 했던 약간의 패배감과 서러움. 그리고 내가 학업에 100퍼센트 집중할 수 없었던 환경들.
이 모든게 내가 꿈을 꾸는 사람이라고 착각해서 느낀 감정 같았다. 그냥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는 것이라 생각하면 그만일 것들이었는데 말이다. 참으로 나는 살아남기 위해서 하루하루를 살았다. 먼 미래를 그릴만큼 여유도 없었는데 꿈을 꿨다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린다.
꿈이라는 것은 본래 주관적이고 개인적일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이것은 꿈이고 저것은 꿈이 아니다 말할 수 있는 근거 역시 사사로울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용감하게 내 꿈을 꿈이 아니었다고 선언하기로 했다. 그리고 이 '생존을 위한 사투'를너머서 한단계 발전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드디어 내 길을 걸어갈 때가 온 것이다.
삶의 형태는 다양하고 그것을 영위하는 방법도 다양하다. 가난했던 20대를 위로하면서 삶의 가치를 재정립하고 싶다는 욕망이 생겼다. 오랜만에 일기장을 열어본 덕에 큰 위안과 자신감을 얻고 간다. 적어도 난 2017년의 목표를 이루었다.
올해, 2020년의 여름이 태풍과 함께 허무하게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며 혹시나 내 젊음도 이렇게 허망하게 사라지지는 않을까 걱정했던 적도 있다. 참 '노란단풍'이 비웃을 일이다. 나는 가을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까먹고 있었다. 앞으로도 일기를 써야하나 고민하게 되었다. 좋은 고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