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올린

by 무연

나의 어린 시절은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을 만큼 상처로 가득하다. 한없이 맑고 깨끗했던 영혼은 학교라는 공간을 만나면서 다 부서지고 한 줌의 재가 되었다.


나는 중산층 가정의 외동딸로, 부모님이 한 명만 낳아서 잘 키우자는 신념을 가지고 낳으셨을 정도로 집안에서 온갖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그 사랑이 독이 되었던 걸까? 나는 겁도 없이 세상 밖에 나서도 모두가 나에게 조건 없는 사랑을 줄 것이라는 어리석은 믿음을 가진 채 외부 환경과 접했고, 나는 바닥 모르는 곳으로 끝도 없이 무너져내렸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티 없이 맑은, 순진했던 나의 행동이 누군가에겐 언짢았을 수도 있겠다 싶다. 그러나 그걸 10살짜리가 알 리는 없지 않겠는가. 악의 없이 한다고 한 행동은 퍽, 그들을 불편하게 만들었고, 그 결과 나는 철저히 혼자가 되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슬슬 시작된 왕따는 학년이 올라갈수록 으레 있는 일이 되었다. 친구를 사귀는 법을 배워야 할 때 나는 그 법을 익히지 못했고, 시간이 흘러감에 어떻게 사람들과 관계를 맺어야 하는 지에 대해서 무지한 채로 몸만 커갔다.


당시에는 학교폭력이라는 단어 자체도 생소해서 내가 당하고 있는 것이 학교폭력인지도 몰랐다. 나는 그저 또래에게 무참히 짓밟히고, 괴롭힘당하고, 고립되어 그 누구의 도움을 받지도 못한 채 괴로움의 나날을 보낼 뿐이었다. 그런 내게 단 하나 이 모든 사태를 담아낼 원망 거리가 생겼는데, 바로 바이올린이다.

어렸을 때부터 한 가지 일에 집중하지 못하고, 끊임없는 자극을 따라 찾아가는 내가 공부에 취미를 붙일 수 있을 리 없었다. 일찍이 나의 떡잎이 그릇됨을, 즉 일반적으로는 대학을 가기가 힘들 것 같음을 알아본, 평생의 엘리트의 길만 걸어왔던 내 엄마는 본인이 한평생 해온 음악이라는 틀을 나에게 씌웠다. 나는 그렇게 초등학생이 될 무렵 내 의지와 상관없이 바이올린을 하게 되었다.


분명 취미로 시작했을 바이올린을 본격적으로 전공하게 된 것은 초등학교 5학년 말. 한창 친구들과 재미있게 놀며 놀이터에서 스트레스 풀 나이에 나는 엄마가 전공한 오르간과 피아노가 놓인 작은 방에 갇혀 몇 시간이고 같은 곡을 반복해야만 했다. 그 무한함의 루프에서 내가 나올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그저 할당량이 주어진 시간이 끝나면, 그제야 해방인 셈이었다.


나는 유독 바이올린을 연습했던 그 방을 무서워했는데, 그 방은 악기들이 있으니 볕을 피하고자 집의 북쪽에 위치할 수밖에 없어 한낮에도 어두컴컴했으며, 악기 색은 또 짙은 갈색이라 그다지 좋은 인상을 주지 못했고, 무엇보다 피아노 위에 놓인 엄마의 사진이 언제든 나를 노려볼 것 같은, 공포영화의 한 장면에서 나는 늘 벗어나고 싶었다.


음악은 시간 예술이라, 만 시간을 연습해도 그 당시에 실수하면 끝이었다. 나는 언제나 그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미술은 지우개라도 있지. 물론 실수하지 않기 위해, 딴생각을 하더라도 손가락 세포 하나하나에 기억시키기 위해 하는 연습이라지만 한순간에 한 음이라도 틀리면 이게 다 무슨 소용인지. 그저 하라니 했고, 해보니 재능이 있다는 말에 거부도 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아니, 어쩌면 나도 공부보다 너는 이게 맞다는 엄마의 말에 저절로 따라갔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 공부는 점점 더 멀리하고 해서 내신은 바닥을 치고, 하는 수 없이 악기를 선택하게 되고.


의욕? 그런 건 없었다. 바이올린을 그만두기 정말 마지막 순간 직전까지 나는 내 의지대로 바이올린을 해본 적이 없다. 눈을 뜨면 연습, 밥을 먹고 나면 연습, 놀러 갈 수도 없고, 쉬는 날도 없다. 연습, 연습. 연습의 지옥 속에서 그나마 드문드문 있던 친구의 놀자는 외침은 그저 허공의 사라질 한낱 신기루에 불과했다.


물론, 하고 싶지 않다고 발악도 했었다. 할 수만 있다면 바이올린을 집어 던지고 싶었다. 이것만 부수면 엄마도 나를 포기할까? 그러나 나는 이미 너무 멀리 왔다. 바이올린이 없으면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있을까. 이미 나는 체념해버린 상태였다.


나는 엄마의 바람대로 예술중학교에는 가지 못했으나 중학교 때 다시 연습에 불을 태우며 예술고등학교에는 들어갔다. 좋은 성적이었다. 바이올린을 전공으로 하는 20명 남짓의 아이들 중 2등. 그러나 엄마는 내심 내가 1등을 하지 못한 것에 아쉬웠나 보다. 마음이 아렸다. 아, 아직도 나는 끝나지 않았구나. 끝이 있기는 할까. 그것은 절망이었다.


나는 예술고등학교에서도 적응하지 못했다. 당연한 것 아니었을까. 초등학교 고학년, 중학교 때 하루에 5~8시간을 연습하느라 아이들과 관계 맺는 법을 배우지 못했던 내가, 여전히 눈치 없이 행동했던 내 자신을 바라보지 못했던 내가, 어느 날 갑자기 반을 휘어잡는 인싸가 될 수는 없었으니까.


나는 자연스럽게 여자아이들 사이에서 버려졌고, 그렇게 나처럼 자의로, 혹은 타의로 버려진 아이들끼리 모여 노는 무리에 어울리게 됐다. 어울리게 되었다는 말이 맞는 표현인지는 모르겠다. 남들이 우리는 볼 때 우리는 그저 떨거지 같았을 테니까.


그러나 다른 무엇보다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그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견제였다. 예술고등학교는 시험을 실기로 보게 되어있는데 시대별 작곡가의 곡을 제한으로 주고 그 안에서 선택할 수 있게 하는 시스템이다. 시대별로 선택할 수 있는 곡이 제한적이라고 해도 그 안에서 레벨은 존재하는 법. 누가 어떤 곡을 하는지 알면 그 아이의 실력을 확인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내가 2등으로 들어온 건, 전교생이 알았다. 바이올린, 첼로, 플롯 등과 같은 기악부는 오케스트라를 필수로 했는데 앉는 순서를 성적순으로 앉혔기 때문이다. 때문에 2등으로 들어온 나는 자연스레 욕심이 많은 아이들 사이에서 견제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관계 맺기 실패한 떨거지처럼 조용히 입 다물고 하루하루를 사는 나에게 언젠가는 친하지도 않은 아이가 다가와 물은 적이 있다. “00아, 혹시 이번에 무슨 곡해? 나 알려주면 안 돼?” 아직도 선연히 기억한다. 그 거짓으로 지어진 선한 눈웃음. 구미호가 있다면 이런 느낌일까.


“꺼질래? 너도 안 알려줄 거잖아.”


그와 같은 눈웃음을 치며 그 아이의 새까만 속내를 쳐낼 용기가 나에게 있을 리 없었다.


“으응, 나는 이번에 이 곡을 해.”


간신히 꺼낸 답이었다. 다음에는 호구처럼 알려주지 말아야지 같은 다짐을 해 봐야 소용없었다. 나는 한평생 쭈구리로 살아왔었으니까.


어떤 것이 원인인지는 명확하지 않았다. 나는 실기가 있을 때마다 분명한 실수를 했고, 나의 등수는 2등에서 3등으로 3등에서 끝내 7등으로 떨어졌다. 견딜 수 없었다. 아무리 기 하나 펴고 살지 못한 나에게도 자존심은 있었고, 바이올린을 그토록 증오하지만, 속내를 감춘 채 내게 눈꼬리 치는 아이들을 실력으로 짓밟고 싶은 이중적인 마음은 점점 더 나를 버틸 수 없게 만들었다.


그때 즈음이었다. 처음 청소년정신과를 방문했을 때가.


“다 그만하고 싶어요.”


생애 첫 두 번의 자해 끝에 나온 나의 말이었다. 죽는다는 것이 뭔지도 몰랐지만 나는 죽고 싶었다. 의사는 내게 바이올린을 하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다고 했지만, 나는 그것을 놓을 용기가 도무지 나지 않았다. 그것을 포기해버리면 엄마, 아빠가 나를 버릴 것 같은 두려움이 휘감아서.


평생 엄마, 아빠의 그늘 밑에 있던 내가 그것을 벗어난 채 살아갈 수 있을까. 나는 바이올린이 싫다, 하지 않았겠다는 말에, 그럼 우리는 너를 아무것도 지원하지 않을 것이며 이제 네가 뭘 선택하든 네가 알아서 해야 한다는 말에 늘 무너지곤 했다. 그것은 더 이상 나를 딸로 사랑해주지 않겠다는 일종의 종말로 들렸다. 피할 곳이, 도망칠 곳이 나에겐 없었다.


해서, 그것은 엄청난 용기였다.

나는 선언한다.


“나 바이올린 안 해.”


바이올린을 하지 않아 오는 것이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내가 엄마, 아빠에게 버려져 보육원을 전전한다고 해도(물론 그건 나의 과대망상에 불과했지만), 이렇게 살 수는 없었다. 정말로 더 하다간 아파트에서 뛰어내릴 것 같았다.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죽을 것 같았지만 스스로는 자살할 생각이 없던 나는 눈물을 머금으며 주먹을 까득 쥐었다. 그것은 정말 모든 것을 내걸고 외친 다짐이었다.


내 선언은 결과적으로 먹힌 듯 먹히지 않았다. 그날 온종일 가족회의가 있었고, 최종적으로 아빠와의 상의 끝에 엄마는 내게 한 가지 제안을 해왔다.


예술고등학교를 그만두게 해주겠다. 대신 대학은 가야 한다. 이제까지 해온 것이 아깝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검정고시를 보고, 수시로 대학을 가라. 거기까지만 하고 그만두게 해주겠다. 너도 지금의 내신으로 대학을 갈 수 없음을 잘 알지 않냐.


나는 생각했다. 엄마의 말이 일리가 있어. 지금 여기서 바이올린을 포기한다면 나는 공부로는 대학을 갈 수 없고, 만약 내 학력이 고졸로 끝난다면 명문대로도 모자라 박사 학위가 기본으로 깔린 우리 집안에서 내가 있을 위치는 없었다.


그렇게 나는 2009년, 고등학교 1학년 1학기를 마지막으로 학교라는 곳을 벗어나 반자유인이 되었다.

학교 공부를 따라가지 못했던 나는 대체로 영어나 수학과 같은 중요한 과목은 과외를 받곤 했는데, 검정고시를 준비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많은 과목을 한 번에 시험 봐야 했지만 혼자 할 수 있는 것은 혼자 준비했고, 과외의 힘을 빌릴 수 있는 것은 그렇게 했다. (웃기게도 과외를 한 것보다 혼자 준비한 과목들이 성적이 더 잘 나왔지만.)


검정고시를 준비하면서 나는 2011년을 목표로 도전할 대학 실기도 함께 준비했다. 여전히 바이올린은 내 의지는 아니었지만, 입시를 보고자 하는 대학의 눈높이를 확 낮춰준 엄마의 포기 덕에 한결 수월했다.


바이올린이라는 무게도 견딜 수 있고, 공부도 크게 어렵지 않았던 나에게 단 하나의 문제는 물밀듯이 밀려오는 외로움이었다. 드디어 학교라는 틀에서 벗어나 쭈구리라는 별칭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지만, 여전히 마음 한쪽이 휑한 외로움은 남아있었다.


당시 무엇에도 소속되어있지 않았던 나는 유일하게 교회를 갈 때에만 또래와 어울릴 수 있었는데 그건 그때뿐이었다. 교회 친구들은 고등학생이라는 신분을 핑계 삼아 주일에도 학원 가기에 바빴고, 또 물리적으로 멀리 사는 탓에 그리 많은 시간을 내어 놀 수도 없었으며, 무엇보다 그곳에서조차 나는 친화적이지 못하고 늘 불협화음을 내기 바빴다.


나는 다시 병들어갔다. 하루하루를 견디며 사는 것이 불안했고, 여전히 바이올린에게 드는 원망은 지워지지 않았다. 그리고 두려웠다. 내가 만약 2011년에 대학을 간다면 정상적으로 학교를 들어가는 것보다 2년을 일찍 들어가게 되는 것인데, 또래와의 관계란 관계를 모두 실패로 경험해본 내가 2살이나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버틸 수 있을까.


잠이 들려고 누울 때면 무서운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나는 또 혼자고, 이렇게 혼자로 메말라 죽어가겠구나. 이것이 내가 학교라는 시스템을 나왔을 때 감당해야 하는 나의 몫이었구나. 너무나 무겁다.


당시에는 학교 밖 청소년이라는 단어도 생소할 정도로 학교를 그만둔 아이들을 주변에서 찾아보기도 힘들었고, 어른이 보는 시선도 그다지 곱지 못해서, 나의 사정을 가장 잘 이해하는 엄마 역시 외부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 그 사람이 나의 외출을 궁금해하거든, “아, 오늘 개교기념일이라서 학교에 안 가요.”라는 겉 좋은 변명으로 나를 감추기 급급했다.


그랬을 것이다. 알게 모르게 엄마마저 나의 해방을 감추려 드는 것이 나를 오히려 더 병들게 만드는 것은.

나의 병은, 어쩌면 그곳에서 시작했고, 멈출 수 있는 때가, 아직은 기회가, 이때에 있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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