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만 졸업하면, 자유인이 될 줄 알았던 나는 또 다시 나의 장래를 걱정하는 부모님이라는 큰 벽 앞에 목이 붙잡히고 만다. 부모님은 내가 졸업을 하자마자 나에게 무엇을 할 것이냐며 하루가 멀다하고 나의 방향을 재촉했다. 마치, 뒤처지면 안 돼. 하물며 너는 남들과 달리 2년이라는 시간을 벌었으니, 더 열심히 움직여야지. 같은 메시지를 주입하는 것 같았다.
이제 갓 20살, 성인이 된 나에겐 생각할 시간이 별로 없었다. 나는 그들의 안달과 재촉에 일관, 침묵했다. 살고 싶어 하는 발악의 일종이었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렇게 5일 정도가 흘렀나. 당시에 나는 주변 사람들의 영향으로 일본 문화에 푹 빠져있었는데(자해를 제외한 유일한 탈출구였다.), 애니메이션이든 취미로 하고 있던 제과제빵이든 뭘 배우더라도 본토에서 배워오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한 부모님은 미적지근, 별 반응을 보이지 않는 나 대신 오히려 본인들이 더 나서 나의 길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어느 날, 종로에 있는 한 유학 센터를 다녀온 엄마는 내게 일본에 가고 싶냐고 물었고, 생각을 깊게 하고 싶지 않았던 나는 그 길이라면, 미래에 대한 고민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겠다, 싶어 제대로 된 일어를 할 줄도 모르면서 고개를 격렬하게 끄덕였다.
2월 중순이 대학 졸업식이었고, 같은 해 4월 초. 내 앞길에 뭐가 있을지 고민할 겨를 하나 없이 나는 그렇게 생애 첫 부모님이라는 보금자리를 떠나 유학길에 오르게 되었다.
무작정 떠나온 일본에서 무엇을 할지부터 정하기 전에 나에게는 한 가지 숙제가 있었는데, 언어라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다. 전문대를 가든, 일반대를 가든 뭐라도 배우기 위해선 일어로 듣고, 말하고, 쓰고, 읽기가 가능해야지 않겠는가.
일어에 대한 베이스가 전혀 없었으니 레벨 테스트에서 가장 최하위 점수를 받고 왕초보 기초반에 들어가게 된 나는 친구 사귀는 것은 뒤로하고 주변 인물들이 나를 독하다고 할 정도로 오로지 일어를 배우는 데에만 전념했다. 일본어능력시험 사전을 하나 들고, 노트 몇 권과 펜 수십 개를 사 들고 앉아 그것이 다 닳아 없어질 때까지. 계속, 또 계속.
내가 이토록 이를 악물면서 언어를 익히고자 버둥거린 이유는 하나였다. 부채 의식. 이때부터 아주 오랫동안 나를 괴롭혔던 단 하나의 단어. 나는 생각했다. 엄마의 마음에 대못을 박고, 바이올린을 그만둔 대신 내가 선택한 길에, 나는 후회를 두어선 안 될 것. 그렇게 선택한 길을 누구보다 잘 해낼 것. 그 두 가지를 마음에 단단히 새기며, 악독하게, 나는 하루하루 누가 하라고 하지도 않은 내 자신과 격렬히 싸워갔다.
그 악독함은 분명 나를 죽음으로 모는 치명적인 독이었지만, 때론 달콤한 빛을 주기도 했다. 2년을 예상했던 일어를 1년 만에 원어민과 듣고 말하는데 전혀 문제없을 정도로 숙달했고, 그 결과 현지 학교에서도 누구에게 밀리지 않을 정도로 우수한 성적을 받아가며, 이방인이라는 신분을 가지고도 반 아이들과의 생활도 무리 없이 해냈다.
엄마가 알아봐 준 정보를 토대로(스스로 관심도 없잖아 있었고) 제과제빵으로 유명했던 일본에서 세계 3대 학교라고 불리는 학교에 입학한 나는 겁을 먹은 것 같았다. 일본은 이지메가 유명하다고 하는데, 다른 나라에서 왔다는 이유만으로 내가 그 대상이 되면 어떡하지?
나의 치열함은 생존이라는 이름으로 또 다시 내 살을 깎아 먹기 시작했다. 나는 진심으로 살고 싶었다. 낯선 일본에서까지 변방의 쭈구리로 있을 수는 없었다.
내가 초중고 학창 시절을 보내며 뼈저리게 깨달은 사실은 하나였다. “누구보다 뛰어나지 않으면 잡아먹힌다.” 때론 그것이 공부였고, 바이올린이었고, 이제는 내가 선택한 제과제빵이 되었다.
나는 온몸의 촉각을 곤두세웠다. 언어에서 밀릴 수 없었고, 이론 수업에서 밀릴 수 없었고, 메인인 실기 수업은 더더욱 밀릴 수 없었다. 하루에 한 번, 3시간 동안 진행되었던 실기 수업은 12명씩 3팀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기초 단계를 어느 정도 배우고 나면 실제 제과점에서 일을 하듯 선생님들이 시간을 재기 시작했다. 그 제한된 시간 안에 제품을 만들어내지 않으면, 거의 완성된 수십 개의 제품은 먹을 수 있냐를 따지기도 전에 가차 없이 쓰레기통으로 처분되었다. 그러니 뒤처짐은 곧 팀 전체의 민폐를 의미했다.
이제는 성인이 되어서였을까. 아니면, 관계에 대한 달관을 맛보았기 때문이었을까. 이방인으로서 살아남기 위한 나의 전략은 시니컬이었다. 누구보다 잘하는 모습을 보이되, 아무렇지 않은 척하기. 당당하게 나의 권리를 찾기. 열정적인 모습을 보여주기. 한쪽에 치우치지 않기. 먼저 관심 있는 척하지 않기. 백조가 물 위를 차분하게 떠 있는 듯 보이나 발아래에선 죽기 살기로 버둥거리듯 나는 치밀하게 내 자신을 가장했다.
전략이 통했을까. 완벽히 통했다. 반 아이들은 자신들의 실습과 학습에 도움이 되는 나를 반겼고, 나는 처음으로 쭈구리에서 인싸가 되는 것이 무엇인지 내 나라가 아닌 곳에서 경험을 맞이했다. 학교에 갈 맛이 무엇인지 느끼고 나니 잃고 싶지 않았다. 지도해주시는 선생님들에게 매시간 칭찬받는 것, 반 아이들에게 경쟁이나 질투가 아니라 진심 어린 인정으로 작용 되는 것. 행복했다. 낯선 땅이었고, 집이 그리웠지만, 학교 안에서도 밖에서도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친구들은 학교가 일찍 마치는 날이라도 되면 근처 놀이동산에 놀러 가자 먼저 제안하기도 했고, 성인이 되었으니 간단하게 맥주라도 한잔하며 실습이 주는 긴장의 피로를 푸는 맥주 친구도 있었다. 시험 시즌이 다가오면 3~4명이 약속이라도 한 듯 모여 학교 근처 24시 카페에 둘러앉아 1시간마다 커피를 마셔가며 이론 공부에 밤을 지새운 추억도 있다.
비로소, 나의 학교라는 마음이 들던 때였다. 애정이 생겼고, 더 공부하고 싶고, 선생님을 존경하고, 친구들의 우정이 눈물겨웠다.
진로를 결정해야 할 때가 앞으로 다가왔다. 제과제빵으로 학교를 다니던 나에게 학교에서 제안하는 여러 가지의 선택지가 있었는데, 그대로 졸업하고 한국으로 귀국하는 길, 제과와 제빵이 나누어져 일본에서 제빵을 배우는 2학년으로 진급하는 길, 그리고 제과의 고장인 프랑스에서 더 고급스러운 제과를 비롯하여 와인, 치즈, 레스토랑 서비스 등을 배우는 길.
내가 사귄 대부분의 친구들은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취직하기를 원했고, 그중 소수는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길 바랐다. 친구들이 하나둘 진로를 선택하는 사이 나는 나의 길을 선택하기에 앞서 부모님과 다시 한번 상의를 했다. 뭘 하더라도 경제력이 없는 나를 지탱해 줄 건 부모님밖에 없었으니까. 음악을 했던 엄마 역시 여러 나라에서의 유학 경험이 있었던 것이 교육관에 영향이 되었는지 부모님은 한 번 하는 거 제대로 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내비쳤다. 지원해줄 테니 프랑스로 가라는 뜻이었다.
진로가 확정된 나는 학교에 지원서를 내고, 간단한 프랑스어 테스트를 거쳐, 가볍게 프랑스 유학행 티켓을 손에 거머쥐었다. 생애 두 번째 유학이 결정되던 날이었다.
가슴이 뛰었다. 내가 배우고 싶은 것을 조금 더 깊이 있게 배울 수 있다는 것이 설렘으로 다가오는 것 같았다. 새로운 환경, 그것도 한국에서 가까운 일본이 아니라 머나먼 유럽, 프랑스. 역시나 언어는 생소하지만 일어를 배웠을 때처럼 일단 시작하면 되겠지. 안 되면 무식하게 외우면 되니까. 내 특기니까. 가서 친구를 새로 사귀어야 하지만 여기서처럼 또 같은 전략을 내세우면 되겠지. 여기서도 통했으니까, 거기도 대부분이 일본 애들이니까.
어느 때고 스멀스멀 올라오는 불안은, 흥분이 맡아 잠재웠다. 잘할 수 있겠지는 곧 나는 거기서도 잘할 거야, 라는 확신으로 다가왔다. 어느 때보다 자신감에 차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으로, 나는 그동안 나를 괴롭혀온 나의 불안을 저 깊은 곳 아래로 가뒀다. 아니, 마주하지 않았다. 그것이 쌓이고 쌓여 시한폭탄이 되어 터질 날만 기다리고 있음을 알지 못한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