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이라는 말을 나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어차피 그럴 수도 없을뿐더러 돌아가도 나에겐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고, 당시에 나는 작디작아 선택을 할 수 있는 힘이 내게 있는지도 몰랐으니까.
그러나 유일하게, 한 번만. 이라고 바라는 순간이 있다면, 제발 그럴 수 있다면, 나는 아마도 이때를 고를 것이다. 일본에서 프랑스로 유학을 가기로 했던 바로 그 순간을.
머나먼 땅, 프랑스. 옆에 붙어 있는 일본과 달리 한국으로 쉽게 갈 수도 없는 그곳에서 나는 사람이 이렇게까지 무너져내릴 수 있음에 대하여, 매 순간 조금씩 사라져가는 나를 통해 아주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알게 되었다.
일본 제과제빵 학교의 연속선상에 있던 프랑스 유학은 일본 학교가 사들인 부지에 실습할 수 있는 옛 성을 개조해 만든 건물과 기숙사 그리고 학교 이름을 딴 와이너리가 있는 포도 농장이 드넓게 펼쳐진 곳에서 시작되었다.
말이 연속선상이지 프랑스에서의 학교생활은 일본과는 전혀 달랐다. 이곳에서도 팀으로 움직이는 건 마찬가지였는데, 제과제빵만 만들던 것과 달리 프랑스에서는 요리를 하는(학교 자체가 요리와 제과제빵 학교 이렇게 두 개가 있다.) 아이들도 함께 유학을 와 완전한 프랑스식 레스토랑 코스를 함께 배워가는 시간을 가졌다.
팀은 3개로 움직였는데, 실제 레스토랑처럼 자신의 전공에 맞게 요리나 제과를 만들어 홀로 내보내는 팀, 제대로 된 제복을 갖춰 입고 프랑스어로 된 설명과 함께 음식을 서비스하는 팀, 오전에 프랑스어를 배우고 점심에 레스토랑에 앉아 각 팀의 서비스와 음식을 맛을 보고 평가하는 팀이 그것이었다.
나의 생활에 빗대어 더 쉽게 설명하자면, 제과를 담당하는 아이들은 아침 당번이 있어 전날 만들어둔 빵을 해동하고, 아침 식탁에 올리기 위해 다른 팀보다 30분 일찍 하루를 시작한다.
이렇게 준비된 아침은 전원이 모인 조회와 함께 이어지고, 조회 후에는 약 1시간 동안 식사 시간이 주어진다. 식사가 끝나면 세 분야로 나뉜 활동이 시작된다. 하루는 제과를, 하루는 서비스를, 또 하루는 프랑스어 수업을 번갈아가며 듣게 된다. 덕분에 어떤 날은 레스토랑 체험자로, 또 다른 날은 실습생으로, 혹은 서비스 제공자로서 점심시간을 보내게 된다. 오후에는 프랑스 현지 선생님의 디저트 시연이 이어진다. 새로운 디저트를 눈앞에서 배우는 이 시간은 짧지만, 밀도 높게 진행되며, 그 후 다시 전원이 모여 아침과 같은 대형을 이루고 저녁식사를 한다. 식사 후에는 각 전공 별 실습실을 청소하며 하루를 정리한다. 하지만 여기서 정말 하루가 끝나는 것은 아니다. 청소를 마친 뒤에도 각 팀별로 모여 다음 실습에 대해 상의하고 준비하는 시간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프랑스에서는 일본보다 더 다양한 디저트를 만들었고, 그만큼 동선도 복잡해졌으니 말이다.
나의 상태가 악화되기 시작한 것은, 일본을 떠날 때만 해도 차오르게 가지고 있던 나의 자신감이 바닥을 찍게 되었을 때부터였다. 나는 다른 무엇보다 언어에서 무너져내렸다. 도무지 프랑스어가 귀에도, 눈에도 들어오지 않았다. 마치 일어가 내 안에 가득 차 몸이 한계라고 외치며 밀어내듯 아무리 애를 써도 속수무책이었다. 어학교 1년, 일본 학교 1년. 만 2년 동안 이제는 자동으로 나오고 있다고 생각한 일어조차 내 머릿속을 고장 내 트리는 기분이었다.
언어가 되지 않으니 수업에 따라갈 수가 없었다. 일주일마다 보는 단어 테스트는 엉망이었고, 현지 선생님이 뭐라고 하는지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다. 그저 시연이 있으니 눈치껏 알아들을 뿐이었다. 선생님과 소통을 해야 할 경우에는 겨우겨우 챙긴 단어 몇 개로 말 떠듬이가 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잘해야 해.”, “지면 여기서 끝이야.”
..... 끝이었다. 견고하다고 생각했던 나의 존재 가치가 유리창 깨지듯 깨져버렸다.
학교 건물을 둘러싼 끝없이 펼쳐진 포도밭이 마치 감옥 철창처럼 느껴졌다. 실습에서도, 이론에서도 밀리니 아이들의 수군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것 같았다. 당당했던 어깨는 내려앉고, 자신감은 어둠으로 꺼진 지 오래였다. 그 어느 누구에게도 위로를 받을 수 없었다. 나의 상황을 알아주는 사람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엄마에게 구조요청을 해도 엄마는 별달리 내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없다는 답을 할 뿐이었다. “거기까지 가서 졸업장도 안 받고 그만할래?”라는 말 앞에 내가 내뱉을 수 있는 말은 없었다. 다시 견딜 수 없는 절벽 위에 선 내가 선택한 것은, 늘 해오던, 익숙한 것이었다.
나름 행복했다고 말하는 일본에서, 자해를 아예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나의 감정은 시도 때도 없이 날뛰는 변덕이라 원인이 있든 없든 감정이 이내 이성을 감당하지 못할 때면 나는 언제나 날카로운 것을 들곤 했다. 그래야 모든 것이 평온해졌다. 그래야, 막혔던 숨이 쉬어졌다. 그런 경험이 쌓이다 보니 몸은 으레 그 방식을 찾곤 했다. 프랑스라고 다르지 않았다.
프랑스에 온 지 그래도 익숙할 때도 되었던 한 날, 실습실 청소를 마치고 난 늦은 밤, 모두가 회의를 하거나 쉬고 있는 시간에 나는 조용히 주방에 들어갔다. 본능적으로 눈이 날카로운 것을 찾았다. 주방이었으니 날카로운 것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시원했다. 무엇이 시원했는지 모르겠지만, 터져버릴 듯 날뛰는 심장에 안정제를 넣은 느낌이었다. 남은 건, 모든 것을 제자리에 놓은 뒤 누구의 방해도 없이 나의 잠자리로 돌아가는 것뿐이었다. 그때 문 앞에서 마주한 일본인 선생님과의 눈 맞춤이란.
당시 선생님이 나를 어디까지 이해했는지는 아직도 미지수다. 그 시간, 바로 개별 상담에 들어간 나는 최대한 나의 상태를 선생님께 이해시키려고 노력했다. 선생님은 내 말을 듣더니 이런 일을 하면 앞으로 내 눈앞에 날카로운 것들을 놔둘 수 없다고 부드러운 경고를 보였다. 나는 날카로운 게 문제가 아니라고 했다. 나는 이곳에 적응할 수 없었고, 숨이 막혀 살기 위해 선택했을 뿐이라고 호소했다. 선생님은 한참 생각하더니, 그럼 모든 수업을 중단하고 쉬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안을 건넸다. 두려운, 제안이었다.
수업을 그만둔다고? 지금도 뒤처지고 있는데, 나보고 어디까지 떨어지라는 거지? 수업은 둘째치고, 끼니를 해결하는 건 어떡하지? 실습을 하지 않으면 그만큼 구멍이 날 텐데 매시간 아이들의 눈초리를 받아 가며 전체 홀에서 밥을 꾸역꾸역 먹어야 하는 건가? 그걸, 내가 버틸 수 있을까?
도망치고 싶었다. 저 끝이 안 보이는 저 포도밭 끝까지 달리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음을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일본에서부터 아니 어쩌면 한국에서부터 치열하게 달려온 나에게 한계가 왔음을 알았다. 미련하게 살피지도, 돌보지도 않은 채 억지로 눌러왔던 시한폭탄이 결국엔 터졌고, 나는 더 이상 수업을 받을 상태가 아니었다. 잠깐이라도 쉼이, 필요했다.
두 주, 14일. 선생님이 제안한 시간을 나는 누리기로 한다.
밥은 다행히 아이들하고 섞어서 먹지 않았다. 밥시간마다 요리를 담당하는 팀 중 누군가가 접시에 1인분 어치를 담아주면 내가 주방 뒷문으로 들어가 음식을 가져가 기숙사에서 혼자 먹고 접시를 다시 그곳에 가져다주면 되는 식이었다. 문제는 그렇게 음식을 가져가는 길에 날씨가 좋다고 밖에서 프랑스어 수업을 받는 아이들의 곁을 지나가야 하는 일이었는데, 나는 일부러라도 고개를 숙이거나 발걸음을 재촉하지 않았다. 아이들이 나를 힐끗거리면 무시했고, 뭐라고 하는 것 같으면 귀를 닫았다. 지금 나에겐 민폐라는 비난보다 이렇게라도 사는 게 중요했으니까.
2주 동안 기숙사에 박혀 무엇을 했는지,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크게 기억에 남는 장면은 없다. 나는 턱밑까지 쫓아온 숨을 겨우 부여잡은 채 침대에 누워 그 숨이 나를 잡아먹지 않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던 기억만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확실히 도움이 되었다. 가끔 일본인 선생님이 찾아와 나의 안정의 여부를 물었던 기억도 있다. 선생님은 그 바쁜 시간을 쪼개서 나와 대화를 해주었고, 내가 다시 기력을 차릴 수 있도록 작지만 단단한 위로를 건넸다. 학교를 진정 그만둘 마음도 없잖아 있었던 내가 그래도 꾸역꾸역 마칠 수 있었던 위로였다.
2주의 시간이 지나고 다시 나의 자리로 돌아왔을 때, 대부분의 아이들은 나의 귀환을 반겼다. 장난스레 구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대놓고 나에게 질타를 주는 아이는 없었다. 나는 다시 한번 최선을 다해보기로 했다.
그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무작정 쉬고 나니 그래도 몸은 움직였다. 그러나 여전히 프랑스어는 되지 않았고, 한 번 놓친 진도를 따라잡는 것은 쉽지 않았다. 마음이 이미 지쳐버린 나는, 학기가 빨리 끝나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어서 이 감옥 같은 성을 나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프랑스 유학 과정은 학기 별로 두 개로 나뉘어 진행되었다. 4월부터 8월까지의 1학기는 학교에서 9월부터 1월까지의 2학기는 학교와 협력 관계를 맺은 프랑스 전역에 있는 가게들에 학생들을 인턴쉽 보내는 과정이었다.
인턴쉽의 모양도 가지각색이었는데, 선생님들이 회의를 거쳐 이제까지 봐와 온 각 아이들의 특색에 맞게 호텔 혹은 일반 제과점 혹은 제과 공장 등 다양한 곳으로 보내는 형식이었다. 그렇게 가면 어떤 애는 호텔방에서 지내거나, 어떤 애는 가게가 가지고 있는 원룸에서 지내거나, 또 다른 애는 가게 쉐프의 집에서 머무는 홈스테이도 가능했다.
인턴쉽 장소가 결정되기 며칠 전, 나와 문에서 마주쳤던 선생님이 수업이 다 끝나고 쉬고 있던 나를 따로 불렀다. 인턴쉽 장소를 상의하기 위함이었다. 선생님들이 일방적으로 결정하지 않고 나에게 의사를 물어 인턴쉽을 결정하게 하는 건 이례적인 일이었다.
선생님은 내가 프랑스어보다 영어가 좀 더 편안하니 공장 쪽으로 가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안을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당시 프랑스 제과 공장은 외국인 노동자들이 많았는데, 그들의 말을 통합하기 위해 영어를 기피하는 프랑스에서 영어를 어느 정도 허용해 주는 곳이 대부분이었다.
솔깃할 법도 한 내가 선생님에게 던진 말은 뜬금없는 것이었다.
“홈스테이가 되는 곳으로 가고 싶어요.”
선생님은 내 말에 고민했다. 홈스테이가 되는 곳은 한 곳뿐이었고, 프랑스 사람이 쉐프이며 일하는 사람들 역시 프랑스어로 밖에 하지 않는 도시 속 작은 제과점이었다.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프랑스어조차 따라가지 못한 채 자신을 통제할 수 없는 모습을 본 선생님의 고민은 타당했지만, 나의 고집은 견고했다.
나는 일본에서 프랑스에 갈 때처럼, 프랑스 학교에서도 인턴쉽에 대한 환상이 있었다. 아기 때부터 자주 외국에 나갔던 경험으로 외국인에 대한 공포나 불안감이 별로 없었던 나는 오히려 동양인들 사이에 있는 것보다 서양인과 지내는 것이 더 재밌고, 흥미롭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풀이 죽어 있던 자신감이 무슨 근거로 올라오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왠지 쉐프와 한집에서 사는 경험은 나를 또 다른 세계로 이끌어주는 하나의 자극으로 작용할 것 같았다.
선생님과의 대화는 길지 않았다. 며칠 뒤, 인턴쉽 장소에 대한 발표로 나는 나의 고집이 통했다는 것을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다시 가슴이 흥분으로 차오르는 느낌이었다. 며칠만 더 버티면 여기서 나가서 새로운 세상을 맞이할 수 있다고, 마침내 끝까지 버틴 내가 이겼다고….
어리석은 녀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