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턴쉽

by 무연



사람은 왜 같은 실수를 끊임없이 반복할까? 왜 나는 그렇게 무너지고도 회복하는 법을 알지 못했을까? 왜 나는 환경만 바뀌면 내가 지금에 처한 상황에서 해방된다고 굳게 믿었을까? 환경을 아무리 바꿔도 나라는 사람이 변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 없는 것을. 내 속 깊은 곳을 파고든 가시는 좀처럼 빠질 생각 없이 더욱 심장 안을 파고드는 것을.


인턴쉽 장소는 학교에서 그리 멀리 않은 장소에 있었다. 학교가 한적한 시골 포도밭에 있다면 거기서 가장 가까운 도시 한 가운데에 인턴쉽 장소가 있었다. 기차로 금방 갈 수 있는 거리였다. 크고 작은 케리어 두 개, 배낭 하나를 메고, 나는 휴대폰 속 지도를 보며 부푼 마음을 안고 인턴쉽 장소로 향했다.

나를 담당하게 된 쉐프는 유명한 사람이었다. 프랑스에서 대통령이 인정한 국가 장인에게만 주는 칭호를 가진 사람으로서 자기 자신과 가게에 대한 자부심이 높은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 밑에서 배울 수 있다는 것은 영광이었다.

학교로부터 내가 도착한다는 말을 미리 들어 알고 있던 쉐프는 반가운 얼굴로 나를 맞이하며 당시 일하고 있던 제과점 직원들을 일일이 불러 나를 소개했다. 그곳에서 일하고 있던 직원들은 쉐프 밑에서 오래 있던 사람들이라 이미 학교에서 정기적으로 학생들이 인턴을 오고 있음을 알고 있었고, 동양인의 새로운 얼굴인 나를 큰 거부감 없이 받아주었다.

앞으로 함께 일하게 된 사람들과의 기분 좋은 인사를 간단하게 마친 나는 인턴쉽을 받는 동안 지내야 할 나의 숙소를 알려주겠다는 쉐프의 뒤를 두근거리며 쫓아갔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분명 홈스테이라고 했던 인턴쉽의 쉐프가 향한 곳은 가게에서 10분 거리의 낡디낡은 한 건물이었고, 이런 건물과 어울리지 않게 유일하게 현대식으로 만들어진 현관을 열쇠로 열고 들어가 한 사람 겨우 지나갈 수 있는 좁은 계단을 끊임없이 올라간 쉐프의 발걸음이 멈춘 곳은 다 쓰러져가는 허르스름한 다락방이었다.

“앞으로 지내게 될 숙소야. 오늘은 여기서 지내고, 내일 아침 5시까지 가게로 오면 돼.”

말을 마친 쉐프는 당황해 마지않는 나를 홀로 남겨둔 채 다시 자기가 왔던 길로 사라졌다.


현실을 부정하고 싶어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나는 천천히 발을 움직여 숙소로 받은 다락방의 상태를 살폈다. 일단 화장실을 이용하고 싶으면 문밖으로 나가야 했다. 이곳에 올라오는 계단을 두고 오른쪽에 변기 하나 달랑 있는 화장실 문이, 왼쪽에 다락방으로 들어갈 수 있는 문이 있었다. 다락방에 문을 열고 들어가면 늘 썩어가는 나무 냄새가 나를 반겼다. 문 바로 옆에는 툭 치면 쓰러질 듯한 나무판자 몇 개가 겨우 버티고 있는 옷장이 있었고, 한 발 정도 앞에 매트리스가 움푹 다 꺼져 허리가 아플 수밖에 없는 침대가, 그 머리맡에 방이 너무 좁은 나머지 그걸로 충분해 보이는 아담한 라디에이터, 그리고 다락방이 옥상에 위치한 탓에 한쪽 벽면은 지붕 모양대로 각도가 심히 기울어져 있었는데, 그곳에는 비가 올 때면 어김없이 빗물이 새던 작은 창문과 붙박이 책상, 의자가 놓여 있었다. 또한 다락방은 3명이 편안하게 서 있을 수 없을 정도로 폭이 좁았는데 침대 바로 맞은편에 한 사람 겨우 들어갈 수 있는 간이 샤워실과 그 옆으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이해할 수 없는, 샤워실과 맞먹는 크기의 주방이 자리했다. 그것이 가진 것 없는 이 다락방의 전부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한 가지 확실한 건, 나를 이토록 당황 시킨 불편한 보금자리는 내가 프랑스에서 겪은 아픔 가운데 그다지 큰 영향을 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나는 이 집에 정도, 마음도 가지 않았지만, 인턴쉽을 하지 않는 날에는 이곳에서 꿈쩍 않았다. 나중에 듣기론 다른 곳에 인턴쉽을 나갔던 아이들은 틈이 나면 프랑스를 여행하고, 탐방하고, 나름의 유학 생활을 즐겼다고 하는데 나는 이 작은 공간, 그중에서도 기울어진 책상에서 하염없이 시간을 보냈다. 어쩌면 낡고, 작은 이 비틀린 공간이 나의 힘에 겨운 마음을 대변하여 주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꿈에 부풀었던 인턴쉽은 시작부터 험난했다. 프랑스어를 구사할 수가 없으니 농담을 치며 웃고 떠드는 직원들 사이에서 나는 언제나 꿀 먹은 벙어리마냥 그림자와 같이 있을 뿐이었다. 그들의 말은 전부 눈치껏 알아들었고, 잘못 알아듣고 엉뚱한 짓을 할 때면 처음에 내게 보인 친절한 미소는 온데간데없고, 냉정하고 차가운 질타를 가차 없이 받아야만 했다.

일은 한 주에 하루 쉬었고, 새벽 4~5시부터 낮 3~4시까지, 그중에 쉬는 시간은 아침(이라곤 케이크에 쓰는 시트 쪼가리) 먹는 30분 밖에 없을 정도로 노동시간은 길었다. 무엇보다 9월에 시작한 인턴쉽은 곧 다가올 제과의 꽃,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있었는데 12월달이 되자 일의 강도는 더욱 강해지고, 길어졌다. 절정인 12월 23일과 24일에는 겨우 4시간 자고 나머지 20시간을 온종일 가게에서 일을 해야 할 정도였다.

학교와 정식으로 맺은 인턴쉽이었음에도 정당한 돈을 받고 일하지 못했다. 그 때문에 나는 프랑스에서 지내는 생활비를 여전히 부모님께 의지해야만 했다. 밥을 먹는 돈, 유일하게 나를 이 생활에서 건져 내주는 인터넷 카드를 구입하는 돈, 어디라도 갈 때면 드는 차비, 샴푸나 세제 등 각종 생활을 이어가기 위해 드는 돈 등. 그래서 선택한 것이 보금자리라고 느껴지지도 않는 곳에 하루종일 앉아 있는 것이었다. 그러면 그나마 쓸데없이 나가는 돈을 줄일 수 있었으니까.


잠자리가 불편한 것과 일이 힘든 건, 견딜 수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노동시간이 길어도, 나는 그래도 내 손으로 무언가 만들어낼 수 있다는 기쁨을 여전히 누리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서양인들 사이에서 잘 지낼 수 있을 거라는 건, 그저 어렸을 때의 패기였다. 나는 성인이고, 인턴쉽이라고 해도 직원과 동등한 한 사람의 몫을 해야 하는 사람이었다. 그 와중에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건, 치명적이었다. 농담을 주고 받는 건 둘째치고서라도 쉐프나 직원들이 나에게 역할로서 요구하는 것에 입력 오류가 되면 재료를 전부 버려야 하는 일도 종종 벌어지곤 했다. 그런다고 안 되던 프랑스어가 갑자기 느는 것도 아니었다. 학교에서 이미 바닥나버린 의지가 생기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점점 내 앞에서 목소리를 높이고, 얼굴이 벌게져 가는 그들이 무서워졌다.

하다못해 영어를 쓸 수도 없었다. 한 날은, 내가 그래도 나를 괜찮게 봐주던 직원과 영어로 대화하는 걸 부쉐프가 보고선 “여기는 프랑스고, 너는 배우러 왔으니 영어를 써선 안 된다.”며 일침을 가했다. 입이 바로 막히는 순간이었다.


하루 10시간 이상, 외딴섬에서 홀로 있는 느낌으로 다만 오늘의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절절대다 보면 달콤한 향에 젖은 옷을 갈아입는 것도 지쳐버린다. 그렇게 신발을 질질 끌고 늘어진 몸뚱이 겨우 지탱해 다락방으로 올라가면 어김없이 내 눈에선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3평짜리 작은 감옥에 갇혀, 내 마음을 대신하여 보여주는 것 같은, 비가 여러 곳에서 새는 창문. 그 창문이 어떤 색을 하든 상관없이 나는 수도 없이 울었다. 1분 1초가 가지 않아 괴로움에 몸부림치던 눈물이었다. 180일. 179일. 178일. 하루하루를 꼬박 세어 가며 한사코 인생을 돌아봤을 때 가장 느리게 갔던 시간. 여기서 그만둘 수도, 더 힘을 낼 수도 없었던, 그저 온전히 모든 것을 견뎌야만 했던 시간.


텅 빈 눈은, 아마 이때부터 나를 찾아왔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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