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절한 생존기에 가까웠던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나는 무엇보다 쉬고 싶었다. 일본과 프랑스라는 큰 산을 넘어왔으니 한 몇 달 숨이라도 돌리고 싶었다. 그러나 그 당시까지만 해도 여전히 보수적 입장을 고집하길 멈추지 않았던 부모님 앞에 내가 쉴 수 있는 곳은 없었다. 바이올린을 졸업하자마자 쫓기듯 일본에 유학을 갔던 것처럼, 부모님은 유학에서 돌아와 집에서 안정을 취하고 있는 나에게 “어서 빨리 취직자리를 알아보아라.”라며 하루가 멀다, 하고 나를 재촉했다. 도무지 집에 붙어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런 내가 취업 자리를 알아본다고, 그래서 어찌어찌 취업이 되었다고 해서 적응을 했을까. 그럴 리 만무하다. 같은 짓을 반복하는 나에 대해서 돌아볼 여유도 없이, 그간의 노고를 위로할 찰나도 없이 취업 전선에 뛰어든 나는 대번에 첫 직장에서 2번의 월급도 받지 못한 채 뛰쳐나왔다. 그때 역시, 나오기 전 부모님을 실망하게 했다는 죄책감에 빠져 차라리 차도에 뛰어들까를 수도 없이 고민했던 것 같다.
나를 이해하지 못한 채 밀기만 하는 부모님이 있는 집에 더 이상 살 수 없겠다, 판단한 나는 독립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어차피 일본 유학에서부터 혼자 잘 살았으니 한국에서 못 살까. 해서 나는 부모님이 사는 옆 구(區)의 외삼촌 댁과 가까운 곳으로 집을 얻어 독립을 시작했다. 이제 본격적으로 독립을 했으니 경제적인 것도 알아서 해결해야 했다.
다행인 건, 제대로 된 쉼 없이 나에 대한 이해가 없는 낯선 사람들과의 일이 버거웠던 내게 어렸을 때부터 가족끼리 가깝게 지낸 한 삼촌분께서 내가 사는 동네에 화덕 피자가 메인인 이탈리아 레스토랑을 내려고 하는데 혹시 피자 도우를 만들며 도움을 줄 수 있겠냐는 제안을 해왔다는 것이다.
나는 이 제안이 무엇보다 반가웠다. 이 삼촌이라면 내가 조금은 편하게 일을 할 수 있었고, 기존에 한국에 자리하고 있던 군대식 주방 문화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내 일처럼 가게를 운영해볼 기회라고도 생각했다. 무엇보다 이 정도 월급이면 내가 혼자 살아가는데 분에 겨운 월급이기도 했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던 나는 당장 삼촌의 제안을 수락했고, 유학에서 돌아온 해의 하반기. 삼촌이 세운 이탈리아 가게에서 총 6년이라는 시간을 일하게 되었다.
아, 6년. 누가 들으면 “와, 진짜 길다. 첫 직장 2달 일한 거 치고 꽤 오래 일했네?” 할 수도 있을 것이고, 또 누군가는 “겨우? 그래도 이왕 한 거 끝까지 해야지.”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일단, 내가 6년까지 일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가게 사정으로 문을 닫게 되어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6년이면 아무리 작은 레스토랑에서 일했다고는 하나 어느 정도 초보는 벗어났고, 조금 더 큰 레스토랑이나 욕심을 부린다면 괜찮은 호텔 레스토랑에서 신입사원은 벗어나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어쩌면 나에게는 더 넓은 세상으로 발을 내디딜 기회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가게가 문을 닫게 되었을 때 다른 곳으로 이직하지 않았다. 정말이지 몇 번이고 절벽에서 떨어질 뻔했던 위기를 넘기며 배워왔던 제과제빵과 요리, 서비스를 나는 이때 다 벗어던졌다.
모든 것이 엉망이었다. 내가 상황을 제어하려고 해도 미꾸라지 빠져나가듯 손잡이는 늘 내 손에 있지 않았다. 적어도 나에게 그곳에서의 6년은 그랬다. 나는 가게 사장인 삼촌을 비롯하여 그곳을 거쳐 간 수많은 이들과 크고 작은 불화를 만들어냈다. 대부분 불화의 시작은 나였다. 나는 삼촌 다음으로 가게를 담당하고 있다는 이유로, 전통으로 배워왔다는 프라이드 하나로, 나보다 나이가 많든 적든 ‘제대로’ 하지 않는 모든 사람에게 지적을 했고, 일침을 놓았다. 나의 말은 퍽, 거칠었고 그 말에 상대가 상처를 입는 건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렇게 나를 멸시하고, 차갑게 대하던 인턴쉽 직원들의 모습이 지금의 나의 모습이라는 것은 인지하지 못하며. 나는 옳았고, 상대는 틀렸다. 그뿐이었다.
말이 6년이지, 그 시간 동안 나는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제대로 섞이지 못한 채 가게에서 일을 했다, 중간에 나왔다, 다시 기회를 줘서 했다를 반복했다. 그러나 그곳에서 다시 기회를 준다고 달라지는 건 없었다. 한 번 불이 붙은 불화는 언제고 끊이지 않았다. 상처는 상처를 불러왔고, 그 안에서 용서와 화해는 없었다.
나는, 나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옳다고 굳게 믿었으니, 틀린 사람들이 너무 많을 뿐이었다. 다만 한 가지 불편한 게 있다면 소통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점점 적어져 간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해받고 싶은데, 나를 이해해 주는 사람이 없는 기분. 나만 이상한 사람이 되어가는 기분. 뭐가 문제인지 잘 모르겠는 기분. 또 다시 혼자가 된 기분.
나는 어김없이 나를 찾아온 외딴섬 한가운데 밀려오는 외로움과 고독을 이겨낼 방법을 알지 못했다. 방법을 모르겠는 내가 끝끝내 선택할 수 있는 건, 결국 하나였다. 그런데,
이 이상의 지옥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프랑스에서의 날보다 어쩌면 지금이 더 엉망진창일지도 모른다는 절망에 빠져 허우적대던 어느 날, 한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