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이 무너졌다. 그건 명백한 멈춤의 신호였다. 굳이 이 시점이 아니더라도 몸의 신호는 종종 있었다. 어학교를 다니며 물먹는 하마처럼 일어를 체득할 때, 일본 학교를 다니며 아이들 사이에서 넘어지지 않으려 애를 쓸 때, 프랑스에서 패잔병마냥 비틀대며 돌아왔을 때. 나의 몸은 더는 갈 수 없다고 외쳤다. 그러나 나는 몸이 주는 간절한 외침을 번번이 무시했다. 몸보다 마음이 더 아팠으니까. 몸은, 잠깐 쉬고 나면 언제나 괜찮을 줄 알았으니까.
마음이 인생의 고비를 넘길 때마다 살을 더 뜯어낸 만큼, 몸 역시 내 발목을 강하게 붙들었다. 처음에는 가벼운 위경련으로 시작한 몸은 변기를 내내 붙들고 있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역류하길 반복했다. 도저히 견딜 수 없어 입원을 해야 했던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그때 잠깐뿐이었다. 그럼에도 자신을 돌보지 않는 나에게 화가 난 것인지 몸은, 기어코 나를 쓰러트렸다.
왼쪽 귀를 맴돌던 목소리를 약으로 없애버린 지 2년이 훌쩍 지난 시간. 이제는 정직원이라는 신분에서 벗어나 일할 사람이 없는 시간에 대타로 가서 일하는 소위 ‘땜빵’ 정도로 가게에 발을 걸치고 있던 시기였다.
한 날은, 떡볶이를 사러 동네 가게를 향하는데 누군가 나의 발목을 강하게 붙드는 것 같은 무거운 감각이 떠나질 않았다. 그다지 경사진 언덕길이 아님에도 숨이 턱 밑까지 쫓아와 거칠게 내쉬기를 반복했다. 걸으면 걸을수록 눈앞이 새까맣게 변해갔다. 심장이 꽉 막힌 듯 가슴에서 통증이 가시질 않았다. 뭔가 이상했다.
떡볶이를 사려던 걸음을 돌려 동네 병원으로 향했다. 먼 거리가 아니었음에도 병원에 들어선 나는 마치 100m 달리기를 전력으로 질주한 사람마냥 헉헉댔다. 내가 심장을 부여잡고 금방이라도 죽으려는 표정을 짓자 심상치 않음을 깨달은 간호사들이 술렁이며 진료 중이던 의사를 불러냈고, 의사가 대기실로 나와 청진기로 나를 급하게 살폈다. 의사는 내 호흡을 안정시키며 곧바로 심전도와 엑스레이를 찍게 했다. 조금 진정이 된 나는 진단해주기 위해 검사 결과를 살피는 의사 앞에 앉았다.
“이상이 없습니다. 젊은 사람이 협심증은 아닐 것 같고. 혹시 최근에 스트레스 받는 일이 있었나요?”
그 말 하나로 나는 대번에 의사가 공황장애를 의심하고 있음을 알았다.(친한 친구가 공황장애를 앓고 있어, 대충 개념을 알고 있는 상태였다.) 나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스트레스. 내가 스트레스를 받지 않을 때는 언제지? 나는 늘, 스트레스를 받는데.
목소리가 없어졌다고 내 문제가 마법처럼 해결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목소리는 마치 막강한 토네이도처럼 곳곳에 잔해를 남겼고, 그 잔해는 청소되지 않은 채 내 안을 떠다녔다. 목소리가 있을 때보다 괜찮을지 몰라도, 갑자기 한순간에 몸이 이상해질 정도의 별일은 떠오르지 않았다.
의사는 정신과에 한 번 가보라는 권유와 안정제를 주겠다는 처방과 함께 나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집에 가는 길 또한 발걸음이 무겁고, 심장이 뻐근했으나 검사 결과가 그렇다고 하니, 나 역시 그 일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바로 다음 날, 아침 해가 일찍 올라온 새벽. 문득 그날따라 눈이 빠르게 떠졌다. 당시 내가 살고 있던 집은 복층이었는데 고양이 밥을 주기 위해 1층에 내려가 사료를 주고 조금 더 눕기 위해 계단을 오르던 찰나였다. 휘청, 발에 힘이 떨어지며 호흡이 빠르게 가빠왔다. 누가 나의 목을 조르는 것처럼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쉰 소리를 연거푸 내쉬며 더듬더듬 계단을 올라와 침대에 앉아도 좀처럼 진정이 되지 않았다. 이러다 진짜 죽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도움을 요청하고자 몇 해 전부터 거제도에 내려가 살고 있던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물론 어제 상황을 알고 있던 부모님도 이 상황이 별것 아닐 것이라고 여기는 의사와 나처럼 큰 위기감을 가지고 있진 않았다. 그러나 하도 나의 상태가 유난스러우니 그렇다면 가까이에 살고 있는 외숙모에게 도움을 청해 병원이라도 가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말을 전했다.
당장 달려와 나를 도와줄 수 없는 엄마와의 전화를 끊자마자 나는 바로 외숙모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의 상황을 침착하게 전한 나는 내가 정신과를 가야 하는 것인지 내과를 가야 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외숙모는 어차피 오늘이 토요일이니 정신과와 내과를 같이 하는 종합병원을 가보자고 했고, 지금 데리러 오겠다는 말에 나는 힘겹게 옷을 갈아입으며 그를 기다렸다.
2차 종합병원에서도 나의 진단은 다르지 않았다. 주차장에서 응급실까지 걸어 들어가는 길이 천리만리처럼 느껴진 나는 병상에 눕자마자 호흡을 안정시키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외숙모는 나를 걱정했고, 심전도 결과를 확인한 의사는 흠, 말을 아꼈다.
“이 정도론 크게 이상이 있다고 하긴 어려워서…. 정 견디기 어려우시면 대학병원을 가보시는 게….”
외숙모는 혹시 정신적 문제가 아닐지, 이곳에 정신과가 있다면 연계해 줄 수 있을지를 물었지만, 아뿔싸, 그곳은 정신과가 없는 2차 병원이었다.
나의 증세는 시간이 지날수록 심해져 갔다. 벌써 낮 12시. 나의 상태를 가까이서 지켜본 외숙모는 차를 몰고 당장 가장 가까운 대학병원 응급실로 한 걸음 내딛는 것조차 힘들어진 나를 거의 끌고 가다시피 데려갔다. 그러나 비교적 빠르게 심전도를 찍은 2차 병원과 달리 대학병원에서는 검사를 진행하는데 큰 문제가 있었는데 바로 당시가 코로나19가 절정으로 유행하던 시기였다는 것이다.
첫 문진에서 나의 혈압과 산소포화도에 이상이 있음을 알게 된 의료진은 나를 응급 병동에 넣어주긴 했지만, 코로나 검사에서 음성이 나오지 않으면 보호자도 출입할 수 없고, CT나 MRI와 같은 큰 검사도 찍을 수 없다고 했다. 코로나 검사 결과가 나오기까지는 지금부터 6시간이나 기다려야 했다.
보호자 없이, 홀로 응급 병동에 들어간 나는 그래도 가만히 앉아 있으면 조금 살아나는 심장에 감사하며 하염없는 시간을 보냈다. 다행히 휴대폰이 있어 지금 올라가고 있다는 엄마나 밖에서 의료진의 부름을 대기하고 있는 외숙모 그리고 이 상황이 조금은 신기해 알려주고 싶었던 친구들과 통화를 하며 지루한 이 시간이 어서 가고 그냥 이제는 빨리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였다.
한 의료진이 내 침상에 가까이 오더니 아까 뽑아간 피검사의 수치가 심상치 않아 CT를 찍어봐야 할 것 같은데 그러기 위해선 코로나 검사의 여부가 나와야 한다는 말을 전했다. 나는 순간 미간을 찌푸렸다. 의료진의 이야기가 내가 지금 겪고 있는 이 불편함이 정신적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는 말로 들렸다. 그렇다면 결론은 진짜 몸이 아프다는 거 아닌가? 왜? 어디가?
1분, 30분, 1시간. 그래도 시간은 갔다. 휴대폰이 아니더라도 내 침상에서 바로 병원 시계가 보여 시간이 흐르고 있음을 나는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띵꽁. 휴대폰의 알람이 울렸다. 코로나 검사 결과 음성이라는 메시지였다. 이제 보호자가 들어올 수 있겠군. 그럼 지금보단 덜 심심하겠지. 라고 생각하는 순간, 나의 마음을 알아챘는지 외숙모 대신 그 긴 시간 거제도에서 서울로 단번에 올라온 엄마가 병동으로 들어왔다. 엄마와 제대로 된 이야기를 나눌 새도 없이 그와 동시에 의료진이 나의 침상을 끌고 CT실로 나를 옮겼다. 언제 맞아도 기분 나쁜 조형제를 맞고 잠시 기다리면 CT 촬영은 금방 끝났다. 다시 응급 병실로 와 의료진이 올 때를 기다리며 나를 사고뭉치라고 생각하는 엄마와 희희낙락하고 있을 때, 갑자기 심각한 표정의 의료진 두 사람이 다가오더니 내가 올라가 있는 침상을 가타부타 붙잡고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엄마도 나도, 영문 모를 일이었다.
내가 이제까지 코로나 검사를 기다리며 장장 6시간을 기다린 곳이 커튼이 칸막이처럼 처져 있는 다인실이라면 내가 다급히 옮겨진 곳은 단단한 유리 벽으로 된 1인 공간이었다. 그곳은 또 다른 응급실의 풍경이 펼쳐졌는데, 비교적 별다른 이슈가 벌어지지 않았던 다인실과 달리 바로 옆에서 숨이 넘어가는 사람들이 즐비해 있었다.
그때부터 2시간가량 오지 않는 의료진에 지쳐버린 엄마와 나는 그때까지도 상황을 인지하지 못했다. 아빠가 밖에서 밥도 못 먹고 기다리고 있는데, 여기서 나가면 아빠 저녁 어떻게 하면 좋을지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으니 말은 다한 셈이었다.
참다못한 엄마가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지 한마디를 하려는 때, 마침 한 의사가 서류를 한 보따리 들고 엄마에게 성큼 다가왔다. 의사는 짜증이 나 있는 엄마에게 지금부터 이 모든 곳에 보호자의 사인을 하라며 종이를 내밀었다. 제대로 된 설명도 없이 이 종이가 뭔지도 모른 채 사인부터 하게 된 엄마는 대체 무슨 일이냐고 따졌으나 그런 엄마 앞에 의사는 되려 목청을 높였다.
“환자 죽어요! 어머니!”
죽는다고? 내가?
순간, 내가 뭘 잘못 들었나 싶었다. 이렇게 멀쩡…. 까지는 아니지만, 곧 죽을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저렇게 많은 종이에 사인을 해야 할 정도로 내가 지금 심각하다고?
엄마는 의사의 호통에 얼떨결에 사인을 했고, 잠시 뒤 그토록 기다리던 의사가 눈앞에 나타났다.
“지금부터 환자를 중환자실로 옮길 겁니다. CT 결과 심장에서 폐로 가는 혈관이 거의 막혀있어요. 그거를 뚫는 시술을 할 건데 목숨이 많이 위험할 수 있습니다. 지금 갈게요.”
다인실에서 1인실로 옮겨졌을 때처럼 의료진 두 명이 침대에 붙어 시속 160km로 밟아대는 스포츠카마냥 응급실에서 중환자실로 나를 옮겼다. 중환자실 문 안으로 엄마는 따라올 수 없었다. 어쩌면 엄마를 볼 수 있는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잠시 스쳤지만, 안녕을 인사할 새는 주어지지 않았다.
심혈관 전용 중환자실에 들어간 나는 당장 막힌 혈관부터 뚫는 시술에 들어갔다. 그것은 스스로 고통을 주는 것보다 훨씬 아팠고, 내가 상상한 것 이상으로 목숨이 좌지우지되는 상황이었다.
시술을 견디며 나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에 내 나이 즈음 되어 보이는 간호사 여럿이 내 곁에 달라붙어 나를 응원해주고, 위로해주었지만 덮쳐오는 고통을 감당해야 하는 사람이 오로지 나라는 것은 변하지 않았다.
마치 몸이 네 마음이 그러하듯 나 역시 이만큼 아팠다, 절규하는 것 같았다. 네가 나를 무시하니 네 뜻대로 죽어주겠다, 선언하는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곯아버린 마음에 죽음을 그토록 갈망하던 내게 몸이 나서 잠시나마 그 한 자락을 보여준 것인지도 모르겠다.
여러 감정이 섞이니, 눈물은 쉽게 멈추지 않았다. 침대 시트가 다 젖어버릴 정도로 피를 쏟은 시술이 끝나고, 나의 안정을 확인한 간호사들이 모두 떠난 후에도 나의 눈물은 흘렀다.
폐쇄병동에서의 주말만큼이나 몸이 주는 신호를 버티기 버거운 주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