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밟지 않은 새하얀 눈밭과도 같은 하얀 바탕의 빈 문서를 하염없이 바라볼 때가 있다.
무엇을 적을까?
어떤 말이 흘러나올까?
머리와 마음은 엉킨 실타래마냥 복잡하고 물이 가득 찬 컵처럼 쏟아져 내리고 싶은데, 막상 손은 움직이지 않는다.
마음을 살펴보는 것이 어리숙한 걸까?
머리를 정리할 시간이 더 필요한 걸까?
결국에 나는,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걸까.
나는 터져 나오는 데로 하얀 문서 위에 나의 감정을 쏟아내는 작업을 오랫동안 해왔다. 그 기록을 살펴보면 생생한 욕도 있고, 아픔도 있고, 감사도 있고. 정말 분류하자면 수십 가지가 될 많은 색이 검정이라는 글씨로 남았다.
이때는 이랬구나, 그날은 이랬구나.
나의 기록은 긴 시간이 지났어도 팔팔하게 살아있어서 그날의 나를 보는, 지금의 나에게 많은 것을 전한다.
그런 날 중에는 정말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은 날도 있다.
봇물 터지듯 써 내려가야 할 검정 글씨는 없고, 새하얀 창이 나를 반겨주는 기록.
지금의 나는 그날의 내가 왜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는지에 대해 앞뒤 정황을 기억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다만 지금의 나는 그 하얀 공간을 하염없이 보다 결국 아무것도 적지 못한 채, 빈칸의 상태를 기록한 그날의 내 감정을 짐작할 뿐이다.
1시간?
아니면 더 오래.
나는 커서가 깜빡거리는 창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열자마자, 적어도 1분이 걸리지 않게 시작의 단어를 써 내려갔던 다른 날과 다르게.
수만 가지의 생각이 오고 갔다. 마음을 울컥거리게도, 식게도 하는 감정이 오락가락했다.
그러다 결국 아무것도 적지 않기로 하고 빈 문서의 상태로 저장해버렸다.
아무것도, 적을 수 없어서.
적는다는 것은, 이렇게나 힘이 드는 일이다.
그마저도 기록이 되어버린 그때의 나를 오늘의 내가 바라본다.
오늘의 나 역시, 무엇을 적으면 좋을지 한참을 고민하며.
엉킬 대로 엉켜버린 생각과 감정을, 어찌하면 좋을지 답을 찾아 헤매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