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의 장소, 목욕탕

by 무연


아파트 시설을 알뜰살뜰 깨먹…. 아니, 깨알같이 이용하겠다는 엄마의 근검정신 절약 프로젝트에 따라, 나는 거제에 온 첫날부터 엄마와 함께 반드시 이용하는 시설이 생겼다. 바로 아파트 내 입주민만 쓸 수 있는 목욕탕.


목욕탕은 헬스장 옆에 붙어 있었고, 당연히 남탕과 여탕은 분리돼 있었다. 이곳 이용객들은, 내가 관찰한 바로는 딱 두 부류로 나뉜다.

첫 번째. 프로 이용러. 일단 몸을 먼저 씻고, 70도나 되는 사우나에 들어갔다 나와, 25도 냉탕에 확, 몸을 던진다. “어후, 시원하다.” 하며 첨벙대다가 다시 사우나, 냉탕을 반복한다. 그리곤 마지막으로 온탕에 몸을 지져주면 마무리. 이들의 루틴은 군인 훈련 수준이라, 물장구 소리까지도 규칙적이다.

두 번째. 관리비 회수러. “집에서 씻는 건 손해다”라는 마인드로, 와서 간단히 샤워하고 돌아가는 사람들. 그 누구에게도 인사하는 시간조차 아까운지 어느새 보면 후다닥 없어지고 만다.


엄마 아빠가 이곳에 내려온 지 8년. 그 사이 얼굴만 아는 사람이 얼마나 많을지는 짐작도 안 간다. 엄마는 목욕탕 문을 열자마자, 마치 시청 행사에 온 구청장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나눴다. 나도 자동 반사처럼 따라 고개를 숙였다. 앞으로 내가 만나야 할 이웃들이니까.


목욕탕은 만남의 장소였다. 아마도 다들 루틴이 비슷해서일 거다. 아침에 가면 ‘아침 조’ 멤버들이 있고, 저녁에 가면 ‘저녁 조’가 있다. 아주 드물게, 같은 시간에 갔는데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을 때가 있었다. 그때 하필이면 샴푸를 또 까먹고 안 가져왔는데, 빌릴 사람조차 없어 겪은 멘붕이란. 그건 정말 드문, 그리고 서늘한 상황이었다.


아줌마, 할머니들이 모인 목욕탕은 동네 정보 허브였다. 누가 이사 왔고, 누가 허리를 삐끗했고, 누가 김장을 50포기나 했는지, 누가 장모님을 모시고 살다가 결국 분가했는지….

이런 이야기들이 사람들이 발가벗은 채로 오가는데, 묘하게 재미있다. 마치 뉴스 속보를 사우나 한가운데서 생방송으로 듣는 기분이었다.

“그 집 아들이 이번에 결혼했대.”

“에이, 아직 혼인신고도 안 했다더라.”

“아니, 그러니까 사돈이….”

이 모든 대화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사우나 안에서 이뤄진다.


엄마 덕분에 나는 금세 동네 젊은이로 주목받았다. 이 아파트, 아니 이 산 속 아파트에 내 또래는 거의 없으니까. 나를 본 이모 뻘, 할머니 뻘 되는 분들은 벌거벗은 내 몸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내 안부를 묻고, 내 미래를 묻고, 있지도 않은 내 남편과 아기의 안부까지 물었다.

“애는 몇 살이야?”

“네?… 아, 아직 태어나지도….”

“어휴~ 요즘 애 낳는 거 미루면 안 돼.”

질문에 대답하다 보면, 물이 아니라 질문에 몸이 퉁퉁 불 지경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그 관심이 싫지 않았다. 얼마 만에 느껴보는 정겨움인가.


목욕탕 스토리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아직 말 못한, 심오하고도 웃긴 이야기들이 많다. 다음번엔 사우나 안에서 일어난 한 편의 드라마를 들려줄지도 모른다. 거제 생활이란, 때로는 목욕탕 수증기 속에서 완성되기도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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