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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짓것, 한 줌

어머님의 한 줌안에는 더 많은 것이 깃들어 있지요.

by 단 정




육수를 우릴 때면 항상 시어머니가 생각납니다. 다시마와 머리를 딴 멸치, 건표고만으로 맑은 육수를 만들던 제게 어머님의 육수 내는 방식은 적잖은 충격이었습니다. 식당에서나 쓸법한 커다란 들통에 다시마, 멸치, 표고는 기본이고 말린 북어와 대파와 양파를 껍질과 뿌리채로 넣습니다. 제가 놀란 부분은 재료의 양입니다. 물의 양보다 재료의 양이 더 많이 들어갑니다. 어머님 식으로 이야기하자면 '다 때려처 넣어!‘ 야 하는 육수입니다. 제가 끓이던 맑은 육수는 어머님의 기준에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레시피였을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육수인지 진액인지 구분할 수 없게 끓여낸 것으로 온갖 요리를 하시는데 찌개나 국은 물론이고 전을 부칠 때 넣기도 합니다. 그중에서 정말 좋아하는 요리는 그 육수에 말아주시는 뜨끈한 국수입니다. 커다란 대접에 하얗게 삶은 소면을 가득 담고 뜨겁게 한차례 토렴을 한 뒤 자작하게 육수를 부어 주십니다. 식구들 순서대로 옛다 하며 식탁에 툭툭 던지듯 주시는 온국수. 후루룩하고 면을 들이키면 입안 가득 들어차는 풍미가 굉장합니다.


젊어서부터 식당 일을 오래 해오셨던 어머님은 자주 과거사를 하소연하시는데 어떨 땐 그 이야기가 은근한 자랑인가 싶습니다. '일본에 살 때 말이지, 엄마가 만든 음식을 맛있어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웃돈을 더 줄 테니 해 달라고 따로 찾아오는 사람도 있었단다.'라는 이야기는 꽤나 흥미로운 부분이었으니까요. 그 음식이 위에 언급했었던 국수라니 더 재미있지 않나요? 마치 드라마 한 편을 보는 것 같아서 그녀의 이야기에 더 빠져들었습니다.


외동아들인 남편과 시부모님, 고작 세 명뿐인 식구인데도 도매시장에서 상자 단위로 장을 보신다는 말을 들었을 때 이 맛을 예감했어야 합니다. 시어머니의 모든 음식은 ’ 재료 과다의 맛‘입니다. 심플하고 담백한 맛을 추구하는 저희 엄마의 요리와는 전혀 다른 결이지요. 거칠고 투박하지만 재료의 모든 것, 껍질부터 뿌리까지 모두 써야 맛있다는 어머님의 생각은 그 음식을 함께 먹고 만드는 세월을 통해 자연스럽게 제게 스며들었습니다.


단점이라면, 어머님의 살림은 일의 양만큼 거칠어 싱크대도, 그릇들도 오래 견디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처음엔 그것이 안쓰러워보여 제 방식대로 도와 드리려 했습니만 평생의 삶이 깃든 한 사람의 부엌을 바꿀 수는 없었습니다.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 제가 이제 와 보니 참 어리석었달까요. 이후 아이가 태어나고 직접 만든 음식을 먹인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깨닫게 되었을 때 저는 비로소 ‘부엌’의 진짜 의미를 알게 되었습니다. 밥을 짓는 곳 이상의 식구들의 몸과 마음까지 어루만지는 양식을 만드는 곳이라는 것을요.


서툰 새댁에서 능숙한 주부로 거듭나며 부엌도 함께 자라납니다. 게다가 제겐 단정의 부엌을 꾸려야 하는 숙제가 있다보니 더 깊게 시어머니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니, 모든이의 부엌을 존중하게 되었습니다.

어무이는 저만 보면 늘 눈물바람입니다. 와이샤쓰 단추구멍만한 눈에 이렇게 눈물이 많아 주책이라며 소매부리로 얼른 눈가를 훔칩니다.

현재 단정의 가게는 원래 시부모님이 사시던 곳이었습니다. 그러니 지금 단정의 부엌은 시어머니의 부엌이기도 합니다. 코로나로 위기를 맞고 가게를 계속 이어나가는 것이 맞는지, 고민이 깊었을 때 흔쾌히 자리를 내어 주셨던 어머님. 다 멈추고 쉬고 싶다고 생각했던 제게 아직 때가 아니라고 해주신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이곳에서 무사히 단정의 일들을 해나갈 때마다 감사의 마음도 함께 쌓아가고 있습니다.


단정의 부엌에서 재료를 다듬고 있을 때면 어김없이 시어머니가 생각납니다. 단정의 맛간장인 ‘계절간장’을 만드는 날에는 반드시 육수를 끓여야 하는데, 이 날은 어머님께 배운 한 수를 쓰는 날입니다. 자르지 않은 커다란 다시마를 통째로 집어넣습니다. 양파껍질도 버리지 않고 잘 모아두고 대파뿌리도 깨끗이 씻어서 모아둡니다. 표고버섯도 먼지나 불순물을 씻어 내고, 밑동을 잘라냅니다. 이 밑동도 모두 챙겨둡니다. 맛간장은 채식을 하는 분들도 드셨으면 해서 멸치나 북어를 쓰지

않습니다. 그래서 토치로 채소들을 그을리는 작업을 통해 부족한 감칠맛을 끌어올립니다. 모두 큰솥에 넣고 10분을 센 불에 끓이고, 중불에서 10분 나머지 20분을 약불에 뭉근하게 끓여냅니다. 반나절정도 식힌 뒤 뚜껑을 열면 재료들이 모두 녹진하게 육수에 배어 있습니다. 저만의 육수이긴 합니다만 어머님께 배운 방법이 들어가 있는 육수이기도 합니다. 이 육수로 만든 맛간장으로 단정의 수제청과 함께 하는 레시피들을 인스타그램에 올리기도 합니다. 이 간장으로 메밀국수도 해 먹고 고기도 구워 찍어 먹고 나물 무칠 때도 씁니다.


오늘도 어김없이 재료를 사러 장으로 갑니다. 대파를 얼마만큼 살까? 양파를 작은 망을 살까 큰 망을 살까? 고민하고 있으면 어머님의 대쪽 같은 음성이 귀에 들리는 것 같습니다.


' 얘! 까짓 것, 한 줌도 안 되는 걸로 그러지 말어! 애끼지 말어. 그냥 때려 처넣야 혀. 그래야 맛있어!!!’


정신이 버쩍 나서 커다란 대파 한 단을 안아 듭니다. 양파도 단단한 놈으로 꼼꼼히 고릅니다. 표고버섯도 아쉬움이 없게 듬뿍 담습니다. 다시마도 좋은 것으로 달라고 세 번은 말합니다. 따라다니던 유낭이 웃으며 말합니다.


" 그러고 다니니 꼭 엄니 같구먼? 손 큰 건

안 닮아도 되는데..."

" 뭔 걱정 이래? 까짓것 한 줌도 안 되는 거.

남으면 나눠먹음 되지."

" 하이고, 어무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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