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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at paint love.

by 단 정


2024년 여름, 잊지 못할 특별한 일이 있었습니다. 제가 애정하는 하고 책방 사장님과 그곳의 단골 편집자님의 권유로 미즈카미 스토무의 『 흙을 먹는 나날 』 이라는 책에 12개의 삽화를 그리게 된 일입니다. 삽화를 그린 것도 그것이 책에 실린 것도 인생에 처음 있는 일이라, 결과물을 손에 받아 들고도 실감이 나지 않아 얼떨떨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아쉬운 점이 있었다면 마감 날짜가 굉장히 촉박했다는 것, 가게 운영과 병행해야 했기 때문에 밤늦게 잠들거나 새벽에 일어나야 했습니다. 어떤 날은 도무지 집중할 수 없고 잘 그려지지 않아 남편에게 괜히 화를 내고 오만상 짜증을 부리기도 했습니다. 영문 없이 히스테리를 부리는 마누라가 참 별스러웠겠지요. 지금 와서 그때의 마음을 되돌아보니, 잘 해내고 싶다는 욕심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미 훌륭하게 써진 글을 그림으로 표현해야 하는 일이니 절대 폐가 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부담감도 한몫했습니다. 늘 주방의 소모적인 일들로 에너지를 소비하고, 그것을 핑계로 돌보지 않았던 제 스트레스와 결핍을 '그린다'는 작업으로 해소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얄팍한 기대도 깔려 있었습니다.


드디어 출간된 책을 부모님께 보여드렸을 때, 예상보다 반응이 심드렁했습니다. 특히 좋아해 주실 것이라고 생각했던 아버지께서 고생했다는 말 외에는 별다른 언급이 없으셔서 서운했습니다. 단정을 시작한다고 했을 때,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부모님이 내심 실망하고 계셨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미술 공부를 한다며 코밑에 연필과 물감 자국을 묻히고 밤늦게 들어오는 딸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해 주셨던 분들은 다른 누구도 아닌 부모님이셨으니까요. 회사에서 잘 자리 잡는 것이 더 좋았으련만 하는 아쉬움을 토로하지 않으셨듯, 단정의 일에도 별다른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다 큰 자식이 하는 일에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을 조심하는 마음도 사랑이라는 것을 어찌 모르겠습니까? 걱정은 뱉는 것보다 삼키는 것이 더 힘든 법입니다. 그래서 당신의 무덤덤한 한마디는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다시 가게로 돌아와 주방에 섰을 때, 문득 깨달았습니다. 제가 느낀 서운함과 결핍은 다른 방법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요. 그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은 전공자라는 사실이나 단순히 그리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 아니라, 아무런 실력과 경험 없이 '0'에서 시작한 단정의 일 덕분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니 일희일비하지 말고 다시 몰두하라는 무거운 뜻이 '고생했다'는 아버지의 한마디에 담겨 있음을 깊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입니다. 어디서든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고, 누구도 뭐라 할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단정의 연장선상에서는 조심스러워집니다. 제 생각과 말이 칼날이 되어 단정을 겨누게 될까 봐 두렵기도 합니다. 진심을 다하고 싶지만, 어디까지 어떻게 담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복잡하고 무거운 저를 움직이게 한, 하고 사장님과 은경 편집자님은 정말 대단한 분들입니다. 이후에도 마감일을 정해 압박하는 그들에게 질색팔색 했지만, 반대쪽에서는 은근히 의지하고 있으니 이 또한 참 아이러니합니다.

이 그림은 책에 실리지 못한 B컷 입니다. 딸과 남편이 가장 좋아하는 그림이기도 합니다.

주택가 깊숙한 곳에 있어 찾기 힘든 단정의 공간은 수시로 자신감을 잃고 숨는 저와 꼭 닮았습니다. 부지런히 끄집어내어 이곳에 있다고 알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래야만 먹고사는 일을 단정하게 이어갈 수 있습니다. 단순히 좋아하는 일로서가 아니라, 반드시 해내야 하는 영역으로 끌어들여야 쓰고 그리는 것도 진정한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을 12개의 삽화를 그리는 과정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올해 글과 그림으로 더 부지런히 단정을 알리겠다는 결심을 한 것도 그런 이유가 가장 큽니다. 또 숨을 곳을 찾을 저를 도망가지 못하게 하는 장치로 글쓰기 모임에 나가고, 그림을 그려서 올리겠다는 약속을 하는 것입니다.


저번에는 가까이에 있는 문구점인 띵크썸띵에 들러 눈여겨보았던 '낱낱'이라는 노트를 골랐습니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일을 처리해야 하는 워킹맘의 요청으로 만들게 되었다는 사장님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더 열심히 쓰고 싶어 졌습니다. 그런 마음을 눈치채셨는지 노트 앞면에 메시지를 새겨주겠다고 하셨습니다. 잠시 고민하다가 차고 있던 목걸이 펜던트에 새겨 놓았던 'Eat pray love.'를 'Eat paint love.'로 수정해서 노트의 앞면에 새겨 넣었습니다.


말 그대로입니다. 지금까지의 기도만으로도 충분합니다. 하느님이든, 부처님이든, 알라신이든, 어딘가에 닿고도 남았을 겁니다. 기도는 그쯤 했으니 되었다. 그러니 이제 좀 하지 그러니?라는 메시지가 아마 어딘가에 잔뜩 쌓여 있겠지요. 이제는 그동안 밀린 수신 확인을 해야 할 때입니다.




먹고사는 일 단정하게 합니다.
instagram. @_danj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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