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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궤적이 되는

by 단 정


사람을 볼 때 손을 유심히 보는 편입니다. 크기가 큰지 작은지, 손가락이 길쭉한지 짧은지, 주름이 있는지 없는지, 뽀얀지 그을렸는지, 손톱이 긴지 짧은지, 손톱을 칠했다면 어떤 색인지, 잡았을 때 단단한지 말랑한지. 손에 대한 소소한 특징을 살피고 잘 기억까지 하는 것을 보면 저는 손을 참 좋아하나 봅니다.


손은 그 주인을 닮아 있는 것 같아요. 성격도 살짝 엿볼 수 있습니다. 남편의 손을 예로 들자면, 한때 여자 모델 대신 손 모델을 했을 정도로 손이 길쭉하게 참 예뻤습니다. 손을 잡고 걸어 다니는 것을 좋아하고 차를 피해 인도 안쪽으로 밀어주는 살갑고 친절한 손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손이 바퀴벌레나 파리를 매정하게 때려잡는 것을 보시면 깜짝 놀라실 거예요. 뭔가를 깬다거나 부서뜨린다면 그것도 역시 남편의 손입니다. 작은 과자를 만드는 것보다 큰 발효빵을 굽는 게 더 쉽다고 합니다. 답례품이 몇백 건 들어와도 그 안에서 섬세함을 요구하는 (이를테면 보자기 포장 같은) 일은 절대 할 수 없다고 손사래 칩니다. 손이 어여쁘다 해서 일의 모양새도 섬세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남편을 통해서 깨달았습니다.


반대로 아버지의 손은 전형적인 남자의 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딸 셋 중에서 제가 가장 애교가 많은 편이라, 아버지를 안는다거나 손을 잡는 일에 스스럼없습니다. 그런 탓인지 사진을 찍어 둔 듯 당신의 손모양새가 명확히 그려집니다. 아빠의 손은 두텁고 네모난 느낌입니다. 특히 엄지 손가락과 손톱이 유독 굵직합니다. 손톱은 늘 바짝 깎으시고, 손바닥에는 잔금이 없고 손금이 대체로 시원하게 뻗어 있습니다. 운동을 좋아하셔서 손부터 팔뚝 언저리까지가 늘 볕에 그을려 있습니다. '좋아해서 한다.' 라기엔, 테니스도 등산도 골프도 수준급 이상으로 해내는 멋진 손입니다. 그 뛰어난 운동 신경을 고스란히 둘째가 물려받았습니다. 정말 신기한 건 둘째의 손이 아버지의 손과 똑같이 생겼다는 사실입니다. 둘의 운전하는 손을 보다가 깨달았는데, 운전 습관이나 핸들을 쥐는 손모양이 너무 닮아서 아이고 아부지요 하면서 동생의 손을 쓰다듬기도 했습니다. 그의 손은 서예와 동양화에도 일가견이 있는데, 그 미술적 감각은 첫째인 제가 물려받았나 봅니다. 쓰다가 보니 신기하네요. 어쩌면 손의 특징에서 유전적인 이력을 알아낼 수 있을지도요.


안타깝게도 현재 그의 손은 붓을 잡지 못합니다. 몇 년 전 발병한 목디스크 때문입니다. 얼마 전 간송미술관에서 함께 여세동보 전을 보고 있을 때, "그림을 보니 좋구나. 다시 그리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해진다."라고 하셨습니다. 평생을 회사원으로 세 딸의 아버지로서 살면서 진짜 손의 본분을 다해버린 것이 아닌가, 정작 하고 싶은 일에 그를 쓸 수 없다는 사실이 딸의 마음을 사무치게 했습니다.

저의 손은 어떨까요. 뚜렷한 특징을 하나 짚자면, 매우 유연하고 말랑하다는 것입니다. 어릴 때는 친구들이 고무 인형이라고 놀릴 정도로요. '손에 매가리가 없다.'는 소리를 자주 들었습니다. 그만큼 힘이 없어 강한 일에 취약했습니다. 무거운 것을 들고 뚜껑을 여는 일을 지지리도 못합니다. 글씨를 쓰고 그림 그리는 일은 제 손이 좋아하는 일입니다. 아침마다 동생들의 머리를 묶어 준다든지, 수저를 가지런히 놓는다든지 하는 매무새가 중요한 일에 자주 쓰였습니다. 제사를 지낼 때면 제기를 정리하고 아버지가 지방을 쓰실 수 있게 먹을 갈고 종이를 준비하는 일을 자주 했던 기억도 납니다. 설거지나 뒷정리를 하지 않았던 것은 힘든 일은 하지 않았으면 하는 엄마의 마음이 가장 컸겠습니다. 그런 엄마도 식사를 마친 뒤 함께 먹을 과일을 깎는 일만은 하게 두었는데, 참 예쁘게 잘 깎는다는 칭찬을 많이 해주셨어요. 아마도 그 칭찬 덕에 날카로운 칼의 무서움을 일찍 이겨냈던 것 같습니다. 역시나 지금 하는 일에 도움이 많이 됩니다.


단정의 일을 하면서 손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여러 사건과 사고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지요. 먹을거리를 일이 된 것은 처음이었던지라 얼마나 느리고 버벅거렸는지 모릅니다. 생강 다듬는 일도 하루 종일 걸려서 꼼꼼한 것은 좋은데 속도를 좀 내자고 했던 동생의 핀잔이 문득 생각이 나네요. 한 가지 생각나는 큰 사건이라면, 매가리 없는 내 손이 10리터짜리 유리 매실병을 옮기다가 떨어뜨린 일이었습니다. 와장창 깨지며 그 많은 매실청이 순식간에 주방 바닥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너무 당황해서 망연자실 서있었습니다. 치우는 일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몰라요. 대걸레로는 도통 그 진득함을 해결할 수 없어서, 못쓰는 수건을 가져다가 무릎을 꿇고 닦고 또 닦고를 이틀을 반복하니 괜찮아졌습니다. 같이 닦던 동생이 헛웃음을 뿌리며


" 와.. 니 진짜 사고 제대로 쳤뿌네...디죽겠다!!"


라고 했었지요. 언니라고 하지 않고 버릇없이 말해도 그날만큼은 할 말이 없었습니다. 항상 매실을 담을 때면 그 기억에 혼자 웃다가 동생에게 전화를 겁니다. 함께 겪은 사건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집니다.


" 그래도 언니는 단정을 단정하게 하는 일을 잘했잖아. 지금은 더 잘하고 있고."


주방에서 우왕좌왕 헤매는 일도, 단정하게 가다듬는 일도, 이제는 모두 내 손으로 해내야 한다는 것. 그 고됨을 알아서 언니의 짐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고 싶었나 봅니다. 그리 말해준 동생의 사려 깊음이 다시 느껴집니다.


손을 주의 깊게 관찰하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아무리 서투른 일이라도 세월이 더해지면 습관이 생깁니다. 손이 배운 습관. 그것이 바로 일머리겠지요. 단정의 일과 제 손이 만난 시간이 8년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제 손은 이전과는 달리 순서를 생각하지 않아도 저절로 움직이는 '일머리'가 생겼습니다. 여러 손을 관찰하며 배워 온 일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습니다.


요즘은 손에 주름도 많이 생기고 습진도 자주 올라옵니다. 예쁘게 손톱을 칠한다거나 반지를 낄 수는 더더욱 없습니다. 마냥 무르기만 했던 지난 시절과는 달리 많이 단단해져 있습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그 정도만큼은 잘 헤쳐가고 있다고 믿고 싶습니다. 그렇게 손의 궤적이 고스란히 삶이 됩니다. 혹시나 지금 서 있는 곳의 좌표를 도통 알 수가 없을 때 가만히 손을 한번 들여다 보아도 좋겠습니다. 분명히 그 흔적이 남아 있을 겁니다. 그것을 기준으로 더듬어보시면 잃어버렸다고 생각한 나의 자리를 찾는 일이 어렵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문득 여러분들의 손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해지는 새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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