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때로는 기계보다 더 소모적인…
착즙기가 덜컥 고장이 났습니다. 도라지청에 들어갈 배즙을 짜다가 일어난 일입니다. 아직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재료만큼 마음에 걱정과 불안이 가득 찹니다. 단정의 주방에서 가장 난감한 순간이 바로 기계가 고장 나는 순간입니다.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듯 짜 맞추어 놓았던 모든 일이 멈추어 버립니다.
단정의 주방에는 많은 기계들이 있지만 인덕션과 착즙기, 오븐 등이 가장 고가의 장비입니다. 이것들은 재료를 만들 때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에 귀하게 쓰려고 노력을 많이 합니다. 하지만 세월 앞에 장사가 있나요. 인간도 기계도 시간의 힘 앞에서는 닳고 낡기 마련입니다. 고장 난 착즙기는 다행히 가까운 곳에 AS 센터가 있었어요. 전화를 드렸던 사람이라고 하니 친절하게 이유를 분석해 주시고 새 부품들을 꺼내 주십니다. 착즙기의 모터가 고장 났다면 해결하기가 어려웠겠지만 부품은 새로 갈면 되니 괜찮다고 저를 안심시켜 주십니다. 안도감에 저절로 농담이 나와서 ‘의사 선생님이시네요! ’라고 하니 웃으시며 ‘여기선 제가 의사가 맞긴 하지요.’라고 합니다.
몇백만 원이 들지 모를 일이 부품값 십오만 원으로 마무리되자 잔뜩 긴장해 솟았던 어깨가 그제야 내려앉습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그간의 긴장과 고됨이 풀리며 졸음이 쏟아집니다. 늘 운전기사 역할을 해주는 유낭이 도착하면 다시 일해야 하니 좀 자두라고 합니다.
‘ 이거 없으면 우리 어쩔 뻔했을까? 돈 많이 벌어서 더 좋은 것으로 들이자.’ 라며 잠꼬대하듯 중얼거렸던 기억이 납니다.
선무당이 장고 탓을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주방에서의 일만큼은 정말 장고 탓입니다. 내도록 앓는 소리에 다치기 일쑤인 내 몸뚱이가 기계보다 나을까요? 가게가 커지고 일이 많아지면 직원을 들여야겠지만 아직까지는 망설여지는 부분이 많습니다. 그 비용으로 좀 더 좋은 기계를 들이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람과 일하는 것과 비교를 해보면 가장 큰 차이점은 감정적으로 소모되는 부분에 있습니다. 일에 집중해야 할 때 서로 눈치를 보며 의중을 파악하는 일에 시간을 들여야 하는 것이 얼마나 소모적인 것인지 잘 압니다. 선배며 후배, 상사면서 부하이고 사장의 직원인 관계를 저 또한 지나왔으니까요. 힘들어서 못 해 먹겠다며 쪽지 한 장을 써놓고 도망가 버린 동료도 있었습니다. 그가 남기고 간 일더미와 무책임함에 대한 것은 모두 남겨진 저의 몫이었습니다. 사람일이 의지와는 상관없이 감당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 경험이었지요.
덤터기를 썼다는 표현이면 이해가 더 쉽겠네요. 하지만 덤터기를 쓴 일까지 깨끗이 완료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투철했던 성격 탓에 그 일마저도 열심히 해결하려 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눈치도 빠르고 말 안 해도 알아서 잘한다는 말을 많이 들었던 지난날들이 지금은 조금 후회가 됩니다. 그것이 결코 잘한다는 개념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단정의 일을 시작할 때 그런 소모로 가게를 채우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당장 내일이라도 그만둘 수 있는 직원보다 언제고 출동 가능한 기계로 주방을 단도리 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렇다고 몸값이 비싼 기계들을 덜컥 덜컥 주방으로 들이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닙니다. 기준을 정해야 합니다. 사람인 내가 덜 피곤하고 덜 아플 수 있다면 직원을 쓰기보다는 기계의 어깨에 기대기로 합니다. 그러나 명심해야 합니다. 그도 반드시 한계가 있습니다. 많이 쓰면 멈추기도 하고 고장이 나서 보내야 할 때도 있습니다. 나를 기계로 대처할 수는 있어도 내가 기계에 대처되지는 않아야 한다는 기준이 생기는 지점입니다.
예를 들어 재료의 상태를 검열하는 것은 기계가 할 수 없습니다. 일일이 손으로 만져가면서 상태를 확인하고 나쁜 것이 있다면 걸러내야 합니다. 작업대 앞에 서 있으면 허리도 무릎도 팔도 뻐근하고 아픈 가장 큰 이유입니다. 날을 세워 재료를 검열하는 일은 기본이기 때문에 기계가 아닌 내 일의 경계 안에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기계가 없어도 해내야 하는 일과 아닌 것의 경계를 잘 정리해야 합니다.
새로 받은 부품들을 끼워 봅니다. 아까와 달리 안정감 있게 즙이 잘 나옵니다. 다시 말없이 재료를 다듬는 시간에 집중합니다. 오래 사용한 착즙기는 찌그러지고 흠집투성이며 손잡이나 버튼의 부분이 닳아 있기도 합니다. 함께 동고동락한 자국들입니다. 그만큼 정이 많이 들었습니다. 쓰고 또 고쳐 쓰는 그 끝에 결국 보내야 하는 때가 오면 아끼던 직원을 떠나보내는 것처럼 마음이 저릿하게 아프겠지요. 그렇게 단정의 시작과 끝을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사람인 제가 먼저 나가떨어지고 기계도 멈추는 날이 오겠지요. 내가 재료인지 기계인지 분간이 안 되는 시간들이 쌓여서 비로소 진짜 단정의 주방이 만들어지는 게 아닐까요. 직원을 쓰지 않는 이유를 굳이 답하라면 아직까지 기계처럼 맡은 바를 충실하게 하는 사람을 만나보지 못했다고 하는 것이 맞겠습니다. 써놓고 보니 앞으로도 만나지 못할 것 같습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