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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일 다시 십이, 단정

드디어, 찻집을 열었습니다.

by 단 정




2025년 8월 15일, 드디어 단정의 찻집을 열었습니다. 수제청과 시럽을 만드는 작업실을 찻집으로 바꾸면서, 좀 더 구체적인 공간이 되었습니다. 찻집의 이름을 이전과 다르게 써야 하나 고민했지만 단정만한 이름은 다시 찾기 힘들었습니다. 대신 간판에 ‘십일 다시 십이, 단정‘이라고 적었습니다. 이 숫자는 표면적으로 주소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고 더 깊게는 11 다음에는 12,라는 뜻으로 멈추지 말고 계속 올라가라는 제게 전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하고 많은 일 중에 왜 찻집이냐는 질문을 많이 받기도 했습니다. 그 답을 찾다보니 자연스럽게 차(茶)라는 단어가 인생에서 어떤 의미인지를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이게 차겠거니 처음 생각한건 외할머니를 통해서였습니다. 할머니는 끓인 물을 병에 담아 잔과 함께 식탁에 놓아두었는데 목이 마르다고 하면 ‘식탁에 오차끼리 놨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오차’는 대부분 구수한 맛이 나는 보리차였고 어떤 날은 결명자차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어렴풋이 오차는 그런 재료를 끓인 물이라는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무엇인가를 넣고 끓인 물이 차다.라는 인식이 그렇게 할머니를 통해 남게 된 것이지요. 그래서 대체 그 ‘오차‘ 가 무엇인가 하고챗지피티에게 물어보니,


할머니가 말하던 ’ 오차’는 지금 우리가 아는 보리차나 옥수수나 곡물차류를 통칭하는 옛 표현이야. 오는 검을 오(烏 까마귀 오) 자야. 오차는 문자 그대로 검은 차, 즉 색이 진하고 구수한 차를 가리켰어. 그래서 오차는 ‘검게 볶은 곡물로 만든 차’라는 뜻으로 쓰였어.


라고 알려줍니다. 사랑하는 손녀딸이 곁에 가는 날이면 늘 ‘오차 묵어라.‘ , ‘ 목욕해라.‘ , ‘ 이불 깔아주까.‘라는 말들로 따스하게 안아주셨는데 지금은 세상에 없는 그녀의 말을 AI 가 다시 해석해 주니 뭔가 기분이 묘합니다. 외할머니가 이 사실을 알게 되신다면 깜짝 놀라겠지요. 그렇게 저를 따뜻하게 안아주는 말 중에 하나가 ‘차‘ 였습니다. 직장 생활로 한창 바쁜 20대 위로의 순간에도 항상 차가 곁에 있었습니다. 스트레스로 폭발할 것 같을 때는 커피빈으로 향했습니다. 커피빈에서 제가 선택한 메뉴는 커피가 아닌 진한 모로칸 민트 아이스티였습니다. 특히 커피빈에서만 먹을 수 있었던 자잘한 얼음을 정말 좋아했습니다. 그를 들고 흡연석인 야외로 나가 앉아 담배를 한대 피웠는데, 그 당시 즐겨 피우던 것은 민트향 담배였습니다. 민트티에 민트 담배의 조합은 답답했던 젊은 날의 가슴을 뚫기에 최적이었겠지요. 그렇게 커피보다 사랑했던 것이 차였고 더 디테일하게는 민트라는 허브였다는 사실을 이 글을 쓰면서 깨닫습니다.


코로나로 모든 일상이 멈춘 듯했을 때, 목디스크가 터지고 대상포진까지 겪게 되면서 막연한 힘듦에 단정을 이어나갈 수 없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포기할 수 없다고 발버둥치다가 우연히 제 눈에 띈 것은 티소믈리에라는 배움의 과정이었고 그를 통해 스승님이 건네주신 가르침은 저를 진짜 차의 세계로 인도해 주었습니다. 살아온 인생을 통틀어 차라고 알고 있었던 것이 차가 아니라는 사실로 처음 수업이 시작되었을 때 적잖이 충격이었습니다.


‘차茶‘ 는 차나무의 차를 뜻하는 단어로, 카멜리아 시넨시스라는 식물에서 자란 잎을 따서 만든 것이 진짜 ‘차茶‘이고 그 외의 허브나 꽃, 과일이나 곡물로 만든 차는 ‘차 아닌 차‘ 즉 차를 대신하는 대용차의 범주에 넣는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진짜 차가 아니면 마시지 않느냐 물어보신다면 절대 아닙니다. 배움을 통해서야 말로 진짜 차와 차를 대신하는 재료, 모두를 끌어안을 수 있는 배포가 생겨났으니까요. 그 덕에 지금의 찻집을 열 수 있지 않았을까요. 거꾸로 이야기하자면, 찻집을 하기 전의 단정이 이미 여러 재료들을 다루는 수제청 가게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차의 세계로 넘어올 수 있었던 것이지요. 지금 단정에게 ‘차(茶)’라는 단어는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가게 하고, 이전의 것들을 더 명확하게 정리할 수 있게 하는 지도이기도 합니다.


두 달 동안의 리뉴얼 공사가 모두 끝난 뒤에서야 부모님께 찻집을 열 것이다라고 말씀드렸을 때 엄마는 ‘차? 그거 뭐 할라꼬?’ 라며 표정이 굳어졌습니다. 가장 어려운 지점입니다. 딱히 설득할 말을 찾기도 어렵고 마흔 중반이 넘은 자식 놈이 시시콜콜 이렇다 저렇다 하기도 마음이 버겁습니다. 잘할 것이다. 잘될 것이다.라는 응원의 말보다 걱정의 말을 잔뜩 짊어지고 돌아온 이곳에는 역시나 ‘차’가 가득합니다.


마음이 우울하고, 어깨가 영 처지는 느낌이 드니 찻물을 끓여야겠습니다. 제 안의 소리를 듣지 못하고 또 남의 말에 귀가 팔랑거릴 때는 차를 우리고 마시기를 시작해야 합니다. 한 주전자 정도를 열심히 마시고 나면 온몸에 따뜻한 기운이 돌고 살짝 땀이 나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하고 나면 반짝 정신이 들고 소중히 꾸려왔던 단정의 지도를 잘 쳐다볼 수 있게 됩니다. 단정의 여정에 차도 들이고, 그 덕에 지도도 찾았으니 이제부터야 말로 제대로 해 볼 만하겠다며 용기를 냅니다.


지도가 저에게 던진 힌트는 ‘11 - 12’

다시 말하면 ‘11 다음엔 12.’ 입니다. 이 다음엔 과연 무엇이 있는지 부지런히 가봐야 알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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