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시
비행기에 올라 심심풀이로 한 말이 있다.
"고난과 역경이 있는 여행이면 좋겠어!"
말이 씨가 된다고 하던가. 비행기에 오르자마자 고난과 역경이 시작됐다.
그 말을 뱉게 된 원인에는 여행 초반부 특유의 센치한 감성이 한몫했다. 여행을 떠나기 전날 저녁, 흣쨔와 나는 비행기에서 읽을 책을 구매했다. 내가 고른 책은 고수리 작가님의 <우리는 달빛에도 걸을 수 있다>. 비행기 창문을 열고 파란색 하늘을 벗 삼아 책을 읽으니, 마치 24시간이 모자라 비행기에서 책을 읽는 성공한 작가가 된 것 같았다.
‘하늘 위에서 책을 읽다니, 나 너무 멋진 거 아니야?’
점심 메뉴로는 스파게티가 나왔는데, 평상시에 먹는 밥 종류가 아니라서 그런지 스파게티는 센치함을 증폭시켜 주기에 충분했다.
‘스파게티마저 완벽해.’
그런데 스스로가 완벽하다고 느낄 때면 자신을 과신하는 실수를 범할 때가 있지 않은가? 이 상황보다 더 힘든 일이 닥쳐도 해낼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 내 능력의 한계를 시험해보고 싶다는 열망에 사로잡히는 순간. 아뿔싸, 바로 그때였다. 기내에 들고 탄 책에서 비행기 에피소드를 읽어버린 것이다.
<우리는 달빛에도 걸을 수 있다>에서 고수리 작가님은 신혼여행으로 파리에 가던 중 비행기에 문제가 생겨 우랄산맥에 비상 착륙했다.
이 에피소드를 읽는 순간, 우리의 여행 역시 (비상착륙까지는 아니더라도) 험난한 일이 있어 기억에 오래 남으면 좋겠다 싶었다. 우리는 해쳐나갈 수 있을 테니까. 우리를 믿어 의심치 않았던 나는
“아, 고난과 역경이 있으면 좋겠다!”라고 말해 버렸다.
그리고 비행기가 흔들렸다.
비행기를 무서워하는 꿀밤이 내가 읽은 책 내용을 듣더니 무서워하기 시작했다. 기내에는 기류가 잔잔해질 때까지 책상을 접고 앉아 있으라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사실 비행기에서 이런 흔들림은 흔한 일이라 이런 것쯤이야 고난과 역경 축에도 못 낀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흔들림이 20분쯤 이어지고 나니, 책에서 읽었던 에피소드와 지금 상황이 오버랩되며 ‘이러다 우리도 사고 나는 거 아니야?’라는 생각이 진지하게 들었다. 이제 나는 손에서 땀이 줄줄 났고 급똥이 마려웠다. 에잇, 센치는 무슨. 살기나 하자!
두 손이 축축해질 정도로 무서워하는 꿀밤과 나, 그런 우리를 평온한 표정으로 지켜보는 흣쨔. 이 모습은 내 완벽한 여행 각본에 없던 일이다.
온갖 호들갑 끝에 비행기는 평온함을 찾았다. 책상을 펼쳐도 된다는 사인이 떨어지자 친구들은 그림을 그리면서 남은 시간을 보냈다. 나는 한 차례 땀을 빼니 몸에 진이 빠져버렸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허기가 진 우리는 간식거리를 사 먹고 숙소에 가기 위해 택시를 불렀다.
고난과 역경은 이 정도면 충분했다.
더 이상은 없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