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번 정도 아버지에 대해 간단히 글을 쓴 적이 있다.
그 나의 아버지께서 지난 9월 8일 월요일 오후 7시 40분경 집에서 소천하셨다.
오늘이 9월 26일이니까 18일이 지났다.
공식적인 사망 원인은 노환, 뇌경색, 파킨슨병이다.
돌아가시기 전 주 토요일에 어머니께서 토요일에 와서 하루 자고 가라고 연락을 주셨다. 올해부터 매주 주일에 본가에 가서 점심을 하고 부모님을 뵙고 있는 터였는데 그날 어머니께서 먼저 느낌이 있으신 듯했다. 지난주부터 산소 포화도가 떨어져서 산소 발생기를 통해서 호흡의 도움을 받고 계셨는데 역시나 여전히 자가 호흡을 하시는 능력이 떨어져서 산소 발생기를 5단계 중 4단계로 놓고 호흡을 하고 계셨다. 의식도 좀 약하시고... 부산에 있는 형도 때마침 함께 할 수 있어서 토요일, 주일을 아버지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너무나 감사한 건 우리 형제가 함께 했던 시간에 의식을 되찾으셔서 반응하시고 그때는 알 수 없었지만 마지막 말씀이 된 '이눔시키'라고 하시기도 했다. 나를 참 좋아하셨던 아버지셨고 투병 중에도 내가 가면 항상 컨디션을 회복하시곤 했기에 이번에도 한 번 더 이겨내실까 했는데 마지막 주말이 되었다. 주일에 마지막으로 보고 오면서 마음이 편하지 않았지만 다시 나의 일상이 있기에 발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긴 했다.
그렇게 월요일에 전화벨이 울리기 시작했고 119를 통해 응급실로 이동을 준비하셨던 어머니께서 119 구조대원의 피드백을 들으시고 흐느끼며 전화를 하셨다. 이 상태로 가면 연명 치료 외에는 조치하는 않는다고 그래서 좀 더 지켜보자고 말했다고. 나 역시 퇴근 후 샤워 후였는데 바로 집으로 이동으로 했다. 이동 중에 어머니와 통화를 하면서 그래도 이렇게 돌아가실 꺼라고는 생각을 못했다. 집에 도착을 하니 아버지는 내가 출발하는 시간에 막 임종을 하셨고 어머니께서 내가 운전을 하는 길에 혹시나 어려움을 겪을 까봐 그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토요일에 아버지께서 하신 말씀이 마지막 말씀이었구나.
어머니는 항상 너무나 침착하셨다. 그 상황에서도 아들의 오는 길을 걱정하셨으니...
그리고 내가 도착하기 전에 깨끗한 흰색의 면 속옷과 면 잠옷으로 환복을 시켜 놓으셨다. 아버지가 새신랑의 모습으로 주무시는 느낌이었다.
내가 도착하고 담임 목사님께서도 막 오셔서 임종 예배를 드렸다. 예배 중 흐느끼시는 어머니를 안아드렸다. 돌아가신 아버지는 아직 따뜻한 체온을 유지하고 계셨지만 가슴의 심장의 움직임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버지의 머리와 가슴에 손을 얹어놓고 한참을 있었다.
아버지 돌아가셨네요. 아버지 돌아가셨네요.
어머니께서 흐느끼시고 계시고 나에게 의지하고 계셨기에도 그렇고 나는 눈물이 흘리지는 않았다.
그렇게 임종 예배를 잘 마무리했다.
다음 순서는 경찰에 연락을 하는 것이었다. 집에서 돌아가셨기 때문에 가정 먼저 경찰에 연락을 해서 현황을 설명했다. 경찰을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 방문을 했고 상황 파악을 위해서 경위를 물어서 아는 한도 내에서 설명을 했다. 그리고 119에서 다시 방문해서 심정지를 측정하는 기계를 통해서 사망 상태를 확인했다. 그리고 형사가 왔다. 형사가 와서 앞에 경위에 대해 물었고 앞에 경찰, 119에 설명한 대로 동일한 상황 설명을 했다. 그리고 명칭이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과학수사대(?) 같은 곳에서 방문하여 집의 구석구석, 아버지의 복용약과 시신에 대한 사진을 여러 장을 찍었다. 아마 사망 원인을 증빙하기 위한 것으로 보였다. 최종적으로 의사가 방문하여 아버지의 상태를 확인하고 사망 선고를 하고 최종 절차가 마무리되었다. 지금까지 장례를 치러보면서 집에서 돌아가신 것은 처음이어서 이걸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 했는데 다행히 큰 어려움이 없이 잘 진행했고 유족의 마음 상태를 헤아려주듯 절차를 진행하며 방문한 모든 이들이 따듯하게 대해 주었다.
절차 마무리 전에 장례식자 예약이 필요해서 그동안 치료를 받으신 은평성모병원 장례식장에 전화를 했는데 마침 넓은 2호실을 예약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지역에서 가장 최근에 지어지고 교통도 괜찮은 편이라 그곳에 모셨으면 했는데 다행히 원하는 곳에서 장례를 진행할 수 있었다.
공식적으로 사망 시간은 21시 08분이었고 그렇다 보니 3일장을 치르기에는 너무 짧아서 4일장을 치르기로 결정을 하고 장례식장의 안치실로 모셨다. 자정이 되어서야 안치실로 모시고 관련 상담을 하면서 다행히 화장터 예약도 너무 이르지 않은 원하는 시간에 예약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가시면서까지 가족에게 장례 일정상에 어려움을 주지 않으셨다. 장례 전 주에는 조카의 피아노 연주회가 있었고 그다음 주는 아내의 해외 출장이 일정이 있었고 그다음 주는 딸의 기말고사가 있었다. 이런 걸 아셨을까 어떻게 이렇게 모두를 배려하셨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임종 예배 후 긴박했던 월요일의 시간들에 대해 어머니와 대화를 천천히 나누었고 가능한 어머니께서 평온하실 수 있게 천천하 안심을 시켜드리려고 노력을 했다. 그 가운데 어머니께서 꾸신 꿈에 대해 말씀을 해 주셨는데 현재 어머니는 백발에 가까운 상태신데 염색을 하시지 않고 아주 우아하게 백발을 유지하고 계신데 흑발로 변한 꿈을 꾸셨다고 한다. 좀 이사하긴 하셨는데 그러면서 조금은 마음의 준비를 하신 듯하다.
월요일에 돌아가시고 목요일까지 장례가 진행되었다. 가족들 각자의 가족들, 친구들, 직장 동료들이 많이 오셔서 슬픔을 함께 해 주셨고 위로와 격려해 주셔서 잘 마무리를 했다. 임관, 발인 후 화장까지 어려움 없이 진행이 되었다. 염을 한 후에 임관을 진행할 때는 가족들이 마지막으로 아버지와 대답 없는 대화를 했다. 벽제 화장터는 은평성모병원과 가까워서 아주 좋은 시간에 예약이 되어 순조롭게 진행을 했다. 그리고 아버지의 말씀대로 고향인 이천에 모셨다. 모시는 길에 아버지의 옛 집터, 다니시던 학교, 동네길을 지나면서 그냥 이런저런 생각에 잠겼다. 좋아하셨을까 하고...
9월 8일부터 11일, 3박 4일 동안 내가 살아온 인생의 가족과 지인들을 모두 만난 시간이었다. 내가 죽었다면 다 이들 중에 얼마나 왔을까라는 생각도 해본다. 부고 안내를 보내지 못한 분들도 꽤 많이 찾아 주셔서 죄송스러웠다. 4일장이다 보니 충분히 시간이 있는 장례여서 나의 예상을 뛰어넘게 많은 분들이 오셨고 그렇다 보니 부의금을 정리하면서 한분 한분 다 기억이 남에도 과연 얼마나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기억하기 어려웠다. 이런 느낌인데 뭔가 단기 기억 상실같이 얼굴과 이름은 기억나는데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정말 지우개로 지워진 듯하다.
장례를 마무리하고 와서 며느리들이 바빴다. 형수와 아내는 아버지의 관련 모든 짐들을 처분했다. 어머니는 어쩔 줄을 모르시면서 두 며느리가 서둘러 밀어붙이니 모두 수용하셨다. 거짓말 보태서 한 트럭 버렸다. 배우자가 사별을 하고 나서 그의 남겨진 유품들이 남은 배우자를 낙심과 슬픔에 빠지게 한다고 한다. 그리고 먼저 경험한 외사촌 누나가 며느리들에게 당부한 얘기기도 했다. 그리고 집 안의 소모품들을 주문해서 나에게 교체를 요구해서 나의 노동도 제법 들어갔다. 아버지께서 사용하시던 의료기기 등을 포함해서 100% 아니지만 꽤나 정리 정돈된 집으로 변모했다. 그리고 월요일 출근 전까지 함께 집에 머물러 어머니와 시간을 보내며 남을 것들을 정리했다.
그리고 월요일까지 휴가였지만 그 주의 입찰 사업이 있어서 준비를 위해 먼저 출근을 했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는 나의 업무 일정에도 어려움이 없도록 해 주셨다. 그리고 그 입찰 사업도 복잡한 경쟁 가운데 수주했다. 올해 계획된 마지막 입찰 사업이었는데 좋은 결과가 나와서 다행이었다.
아버지는 뇌경색으로 쓰러지신 후 중환자실 40여 일 포한 약 두 달과 병원 생활 후에 투병 생활을 약 1년 하시고 돌아가셨다. 아직도 기억이 나는 건 중환자실에서 집으로 퇴원하면서 담당 수간호사가 집에서 사용해야 하는 의료용 소모품을 한 가방 챙겨주며 어머니와 나에게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슬퍼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말을 해 주었다. 그 말인 즉 돌아가셔도 이상하지 않은 만큼 많은 고비를 넘기셨다는 말이었다. 퇴원하시고도 11개월을 우리와 함께해 주셨다. 어머니께서 가장 힘드신 상황이셨지만 함께 보낸 그 시간들이 오히려 회복과 기쁨의 시간이었다는 말씀을 하신다.
난 아직도 제대로 울지 못했다. 꼭 울어야 되는 것을 아니지만 인생의 가장 큰 슬픔 중에 하나인 부친상인데 너무나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보내드렸다. 문상 온 선배들 중에 나보다 각각 2, 3주 먼저 아버지와 어머니를 보낸 분들이 있는데 길을 걷다가 갑자기, 지하철을 탔는데 갑자기 그리움이 몰려서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는 얘기를 하면서 천천히 하라는 당부를 전했다.
아버지께서 중환자실에 계실 때는 짧은 시간이지만 매일 그 변화를 살펴보았고 다행히 퇴원하고 회복하시면서 다시 오래 곁에 계실 거라 생각했다. 중환실에서 아버지의 상태를 살펴보는 것은 나에게 많은 인내를 요구했다. 주사와 투약되는 병들을 보며 이렇게 사는 게 맞는 것인가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 과정을 모두 봤기에 차라리 천국에서의 삶이 아버지에게 더 괜찮은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존재하기도 했다.
그런 부분 때문에 내가 깊은 슬픔에 빠지기보다 아버지에 대해 더 좋은 기억을 남기려고 하는 것이 아닐까
아니면 아직 내가 아버지를 보내드리지 못한 것인지 잘 모르겠다.
아무튼 최근 삶의 집중력이 현저히 떨어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할 일을 못하고 있다는 것은 아닌데 통 글이 써지지 않아서 이렇게 정리하는데 시간이 흘렸다.
좀 지치기도 한 듯한 게 사람과의 단절과 모바일을 통한 연결에 대한 단절이 간절하다.
이 두 가지가 나에게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어디든 갇히게 되거나 떨어져 있고 싶다.
물론 안타깝게도 현재의 나에게 불가능한 상황이다.
최근 꿈에서 집에 친구들이 와서 아버지와 함께 식탁에서 밥을 먹는데 나의 제일 친한 친구가 아버지의 손을 잡고 울어서 '너 왜 울어 이 새끼야'하고 말을 하고 또 전에 아버지께서 오이소박이의 부추를 밥에 비벼드시곤 했는데 또 다른 친구가 그렇게 드시도록 오이소박이를 밥에 올려드렸다. 내가 옆에서 뭘 맨날 그렇게 드시냐고 하는데 '아버지 돌아가셨지' 하면서 나 스스로 꿈을 깨고 아! 하고 있다가 잠시 다시 잠이 들었는데 꿈에서 다시 아버지가 나타나시면 '아버지' 불렀다가 '이거 꿈이구나' 하는 내 모습을 보고 있다.
그냥 좀 천천히 하려고 한다.
훌륭하신 분이셨다. 존경하고 존중하고 사랑하는 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