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다은 Mar 26. 2020

오래된 이별

제대로 인사를 해야 제대로 헤어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카페에서 우연히 마주쳤던 그 날에 김은 나를 보고 있었다. 커피를 받아온 내가 자리를 잡고 앉을 때까지도 김은 아는 체를 하지 않았다. 내 쪽에서 발견하지 않았다면 끝내 그는 나를 부르지 않았을 것이다.

 

눈이 마주쳤을 때 소리 내어 놀란 나와 달리 그는 소리 없이 웃었다. 이번에도 소란스러운 쪽은 나였다. 언젠가부터 김은 서두를 것도, 요란할 것도 없다는 듯 느긋했다. 그런 사람은 무언가 놓쳐본 적 없거나 누군가 아쉬워해 본 적 없는 사람일 거라고만 생각했으나, 김의 표정은 그런 사람들의 표정과 결이 조금 달랐다. 그는 오히려 잃고 싶지 않았던 하나까지 모두 잃어본 사람 같았다. 다시는 어떤 것에 기대를 걸지 않을 거라는, 뭔가 모를 염세적인 다짐이 그의 미소에는 서려 있었다.

 

그가 몇 년 전만 해도 그런 미소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걸 알았으므로, 나는 그의 태도를 바꿀 만큼의 큰일이 무엇이었는지 그저 짐작해볼 뿐이었다. 그 안에 내가 있기를 한 번쯤 바라기도 했다.     


먼저 발견하고도 나를 부르지 않은 게 괘씸했지만 바로 짐을 챙겨 김의 앞 테이블에 가 앉았다. 테이블은 다르지만, 의자만 보면 등을 맞댈 수 있는 가까운 자리였다. 김이 몸을 반쯤 돌려 말을 걸었고 나도 그에게 반만 몸을 돌려 대답했다.

 

걔는 어떻게 지낸대?

아직도 그러고 있대.

둘이 어쩌다 만났을까?

근데 안 어울려 둘.

그래서 너는 어디 가고 싶은데?

지원은 했는데 잘 모르겠어.

걔 얘기 좀 해봐.

하기도 싫어.

처음부터 만나질 말았어야지.

그러게 대체 나 왜 그랬을까.

 

우리는 함께 일했던 일터와 동료에 대하여, 떠나보려는 나라에 대하여, 서로가 아는 사랑했거나 사랑할 뻔했던 사람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궁금하지 않은 화제를 제일 궁금하게 물어볼 수 있는 김과 재미있지 않은 소식을 제일 재미있게 전할 수 있는 나의 대화는 오래 소란스러웠다. 사실 그건 웃겨서라기보단 텅 비어있기 때문이었다. 정작 하고 싶은 말은 감추고 애꿎게 길어져만 가는 대화는 먹으라는 음식은 안 먹고 약만 고집스레 늘리는 노인처럼 점점 야위어갔다.   

  

대화가 끊길 때마다 김과 나는 똑같이 벽을 쳐다보고 있었다. 김이 나를 너무나 잘 알 듯 나도 김을 너무 잘 알아서, 얘기하지 않아도 김의 보이지 않는 곳까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가난해진 우리 사이를 더듬어 보았을 것이다. 앞자리가 빈 각자의 테이블을 못 본 척하듯이, 많은 생각을 품고도 속없는 척 키득거린 서로에 대하여 아파했을 것이다. 내가 그랬기 때문이다. 너무 잘 안다는 말은 너무 같았던 경험으로 이제는 나에 비추어 그를 읽을 수 있다는 뜻이라는 걸, 나는 김 덕분에 알았다.

      

익숙한 속도로 다가오는 허무를 보며, 슬프게도 나는 안심했던 것 같다. 마침내 어떤 허락을 받아낸 사람처럼. 나와 김이 진짜 헤어질 때가 왔음을, 우리 아닌 다른 누군가도 인정해준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때에야 김에게 해야 하는 말이 아니라, 해주고 싶은 말을 떠올렸다.

 

'나를 부르던 너. 너는 나를 발견해준 사람이야. 네가 발견한 나를 좇아 좋아하던 내가, 이제는 네가 모르는 나를 발견한다. 그래서일까. 어느 때부터 너는 나를 부르지 않아도 좋은, 그런 사람이 되어 있었어. 우리는 단 한 번 제대로 마주 보지 못했지만 그래도 이제는, 힘껏 당겨 앉아 각자의 앞 사람을 바라봐 주자.'라고 나는 말해주고 싶었다. 오랜만에 머리 대신 마음을 열심히 굴린 말이었지만, 그래서 끝내 내뱉지 못했다.


김이 등을 돌려 앉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김에게 작별을 고하기 위해서였다. 김은 벌써 가는 거냐고 물으며 나를 바라봤다. 나는 먼저 손을 흔들었다. 마주 보고 소리 내어 인사했다. 그가 느긋했는지도 모를 만큼 내 마음껏 소란을 떨었다. 제대로 인사를 해야 제대로 헤어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